“역사가 우리를 망쳐놨지만, 그래도 상관없다.”
이 강렬한 문장으로 시작하는 소설 <파친코>는 재일교포 4세대의 이야기를 다뤄 전미문학상 최종 후보까지 오른 걸작이다. 이 작품은 현재 애플TV에서 거액의 제작비를 들여 드라마로 제작될 예정이라고 한다. 다음은 이 소설의 저자인 이민진 작가가 한 강연에서 한 말이다. 한국인의 정체성과 세대 갈등에 관하여 깊이 생각해볼 만한 좋은 글이라고 생각한다.
—————————————-
가장 먼저 제 행사에 나타난 한국인들은 대개 베이비붐 세대인 한국계 미국인 남성들입니다. 그리고 그들은 이민 1세대로 매우 학구적인 타입의 사람들입니다.
그는 첫 번째 줄이나 두 번째 줄에 앉습니다. 그는 이렇게 팔짱을 낍니다. 그리고 보통 조끼를 입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한국인들은 조끼를 좋아하기 때문이죠(농담). 제가 책을 읽거나 사회자들과 대화를 나누는 동안 저는 이 남자를 알아차립니다. 그는 슬라이드 위의 박테리아 표본처럼 저를 살펴봅니다.
그런데, 저는 사람들 앞에서 말하는 게 항상 긴장됩니다. 그래서 저는 지금 무섭습니다. 그의 주의 깊은 시선 아래서 저는 정말 완전히 파괴됩니다.
행사가 끝난 후, 이 신사는 저에게로 행진하듯 걸어옵니다. 그리고 손때가 묻은 <파친코> 책이나 <백만장자들을 위한 공짜 음식>(이민진 작가의 데뷔작) 책을 흔들어 보입니다. 그리고 이렇게 말합니다.
“내가 이걸 사지는 않았어요.”
그러면 저는 어깨를 으쓱합니다. 한껏 부끄러움을 느끼면서 말이죠. 그가 살 가치가 없다고 생각하는 그런 책을 썼다고 생각될 때 느끼는 부끄러움이죠.
“내 미국인 환자가 이걸 내게 줬어요. 그녀는 내게 이 책을 읽어야 한다고 말하더군요.”
그러면 저는 고개를 끄덕입니다. 왜냐하면 전 그때 다른 무엇을 해야 할 지 잘 모르기 때문이죠.
“난 이 책을 읽었어요.”
그가 말합니다. 그리고 전 머리를 숙입니다.
“오늘 밤 내가 여기에 왔어요. 왜냐면 당신이 누구인지 보고 싶었거든요. 난 아주 바쁜 사람이에요. 보통은 서점 행사에 갈 시간이 없어요.”
전 그를 올려다봅니다. 이 남자는 제가 20살이던 해에 돌아가신 할아버지를 생각나게 합니다. 그리고 약간 고개 숙여 그에게 인사하고 있는 자신을 발견합니다. 마치 대학생처럼 말이죠. 그리고는 이렇게 말합니다.
“와주셔서 감사합니다. 제가 당신 책에 사인해드려도 될까요?”
그는 ‘음…’이라고 말합니다. 그 말은 한국인에게 ‘YES’라는 말입니다. 그리고 저는 그를 위해 그 책에 사인합니다. 그리고 이 말들을 쓰죠. 여러분이 제 행사에 올 때 제가 자주 쓰는 말입니다.
저는 “우리는 가족입니다.”라고 씁니다.
제가 이 글을 쓰는 이유는 독자들이 우리가 인간으로서 깊이 연결되어 있다는 것을 알아주길 바라기 때문입니다. 그는 이 문장을 읽으면서 저를 봅니다. 그리고 마침내 말합니다.
“그 책은 좋았어요.”
그리고 제가 어떤 말을 할 기회를 갖기 바로 직전에 돌아서서는 곧장 서점을 걸어 나갑니다. 그러면 저는 사인회 줄에 있는 다음 사람을 향해 몸을 돌립니다. 하지만 그날 저녁의 나머지 시간 동안 저는 이 남자를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많은 한국인을 만나오면서 다음 사실을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 독서 행사에 오는 것이 그에게 얼마나 큰일이었는지를요. 그리고 저는 압니다. 그가 평생토록 얼마나 열심히 일해왔는지를요.
보통 혼자서, 보통 잘 알려지지 않은 채, 그리고 보통 그의 미국인 동료들에게 오해를 받기도 하면서 말이죠.
그리고 그는 충분히 칭찬받은 적이 없을 것입니다. 그가 해낸 그 모든 일에 대해서 말이죠. 저는 그의 환자가 그에게 책을 선물했다는 것을 압니다. 왜냐하면 환자들은 그들의 의사가 좋은 의사일 때 선물을 하기 때문이죠.
그리고 저는 그가 그걸 알았으면 했습니다.
—————————————-
이민진 작가의 말에는 지혜와 이해심과 따스함이 담겨 있다. 그를 찾아온 베이비붐 세대(5060) 남성의 태도는 얼핏 무례해 보이기도 한다. 하지만 그녀는 딱딱한 태도만으로 그를 평가하지 않았다. 그녀는 역사와 세대라는 거대한 맥락을 바탕으로 상대를 이해하고자 했다. 상대의 태도에 순간적으로 반응하지 않고 맥락까지 고려하는 모습에서 그녀가 지혜로운 사람이라는 걸 느낄 수 있다.
다음은 그녀의 연설에서 가장 인상 깊었던 부분이다. “이 독서 행사에 오는 것이 그에게 얼마나 큰일이었는지를요.” 그녀는 이민자 초기 세대들의 고통을 알고 있다. 미국에서 아시아인들이 당하는 차별과 멸시도 알고 있다.
한번 생각해보라. 평생 성공만을 바라오며 산 남자가 있다. 어릴 때부터 반드시 성공해야겠다는 마음가짐으로 열심히 공부해서 의대에 진학한다. 하지만 끝이 아니다. 아시아인에게 쏟아지는 차별도 극복해야 한다. 의사로서 안정된 궤도에 오르는 것은 절대 쉬운 일이 아니었을 것이다. 과연 이 남자에게 ‘소설’ 따위를 읽을 여유가 있었을까?
하지만 이 남자는 그걸 이뤄냈고, 이제 독서 행사를 찾아갈 정도의 여유도 얻었다. ‘이 독서 행사에 오는 것’은 이 남자에게 인생 전체가 걸렸을 정도로 큰일이었던 셈이다. 그리고 이민진 작가는 그 모두를 이해해줄 정도로 그릇이 큰 사람이었다.
그녀는 사인에 “우리는 가족입니다.”라는 말을 적었다. 괜히 베스트셀러 작가가 된 게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녀는 독자의 마음을, 여기서는 눈앞에 서 있는 상대의 마음을 제대로 파악하고 있었다. 그 남자는 이민자의 아픔을 녹여낸 책을 보고 여기까지 찾아온 사람이다. 그의 가슴을 울리는 한마디로 ‘우리는 가족입니다.’라는 말보다 더 훌륭한 말이 또 있을까?
그런 말을 해줄 수 있다는 점에서, 나아가 그런 남자에게 칭찬의 한마디를 건네주려는 마음에서, 가슴이 뭉클해지는 따뜻함이 느껴진다. 유시민 작가는 저서에서 이런 말을 했다. “사는 만큼 쓴다. 글쓰기는 자신의 내면을 표현하는 행위다. 표현할 내면이 거칠고 황폐하면 좋은 글을 쓸 수 없다.” 이민진 작가만큼 이 말이 잘 어울리는 사람이 없을 듯하다. 그녀는 좋은 글을 쓸 수밖에 없는 사람 같다.
참고 : 한국계미국인 베스트셀러 작가가 말하는 한국인 아재 특징.jpg, pgr21 (링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