트위터에 올라온 글을 번역한 게시물이 한 커뮤니티 사이트에 올라왔다. 인터넷 시대를 살고 있는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가 매우 큰 글이라고 생각한다. 어째서 ‘정의’가 세상에서 가장 위험한 사상일까? 3편의 영화를 통해 그 이유를 알아보고자 한다.
1) <더 보이>, 정의가 필요한 이유
정의로운 캐릭터를 찾고 싶다면 히어로 영화를 떠올리면 된다. 정말 많은 히어로 영화가 나왔고, 주인공들은 하나같이 정의로웠다. 그중에서도 가장 정의로운 캐릭터를 꼽으라면 나는 슈퍼맨을 고르고 싶다. 바른생활 그 자체에 나쁜 생각은 조금도 가지고 있지 않다. 게다가 정의를 관철할 막강한 힘도 가지고 있다. 이 힘이야말로 슈퍼맨의 가장 큰 매력이 아닐까 싶다. 어린 시절 무적의 슈퍼맨을 보며 가슴이 웅장해지는 경험을 느꼈던 사람이 나뿐만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그런데 그 슈퍼맨이 악당이 되면 어떻게 될까? 실제로 영화 <슈퍼맨 3(1983)>에서는 악당이 된 슈퍼맨이 등장한다. 크립토나이트에 중독된 슈퍼맨의 성격이 변했고, 온갖 나쁜 일을 벌이고 다닌다. 이 작품은 슈퍼맨의 악행을 다소 코믹하게 그려냈지만, 생각해보면 소름 돋는 일이다. 가장 강력한 존재가 악당이 된다면, 그 악당은 누가 막을 수 있을까?
이런 상상을 좀 더 진지하게 그려낸 작품이 바로 <더 보이>다. 영화의 주인공인 브랜든 브라이어는 누가 봐도 슈퍼맨의 패러디였다. 우주에서 왔으며, 자신의 정체를 깨닫게 되고, 슈퍼파워를 각성하게 된다. 그런데 문제가 있다. 이 소년은 정의롭지 않다는 점이다. 슈퍼맨이 악당이 되는 순간 영화의 장르는 공포로 바뀐다. 이를 의도한 듯 섬뜩한 장면을 일부러 노출시키기도 한다. 정의 없는 힘이 얼마나 끔찍한지 잘 보여주는 작품이라 할 수 있다.
힘없는 정의는 무력하고, 정의 없는 힘은 폭력이다. – 블레즈 파스칼
2) <다크 나이트> 시리즈, 빗나간 정의
그래도 슈퍼맨의 정의는 쉬운 편이었다. 슈퍼맨의 작품 속에는 선과 악이 명백하게 나누어져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현실은? 현실은 그렇지 않다. 무엇이 선이고 무엇이 악인지 모호한 경우가 많다. 히어로 중에는 존재 자체로 선과 악의 모호성을 담은 캐릭터가 있다. 바로 배트맨이다.
배트맨이 정의로운지 아닌지 따지기 전에 이것부터 알아보자. 배트맨이란 존재는 합법적인가? 아니다. 배트맨은 위법이다. 아무리 범죄자가 판을 치더라도 일개 시민이 그들을 처단할 권리는 없다. 국가는 그런 권리를 법에 따라 경찰에게 부여한다. 달리 말하면 경찰은 합법적인 폭력수단이다. 더 많은 사람의 생명과 재산을 보호하기 위해 폭력이라는 권한을 부여한 셈이다.
배트맨은 그 논리를 완벽히 무시하는 존재다. 일종의 허가 없는 자경단인 셈이다. (공식적으로 고담 경찰국은 배트맨을 공개 수배하고 있다) 그래서 배트맨은 끊임없이 고뇌한다. 자신이 하는 일이 정의인지, 설령 정의라 할지라도 그것이 초래하는 결과가 비극으로 끝나지는 않을지 걱정한다. 그런 고민이 배트맨을 정의로운 존재로 남을 수 있도록 한다.
그럼 배트맨에 등장하는 악당들은 어떨까? 1편 <배트맨 비긴즈>에서는 라스 알 굴이라는 인물이 등장한다. 그는 고담시가 되돌릴 수 없을 정도로 부패했고, 그래서 고담시를 초토화함으로써 정화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과연 이것은 올바른 일일까? 영화를 보는 우리들은 라스 알 굴이 미친놈이라고 생각하겠지만, 라스 알 굴 본인은 자신을 정의의 사도쯤으로 여긴다. 비슷한 방식으로 역사를 바로잡아 왔고, 이제는 고담시를 바로 잡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3편 <다크 나이트 라이즈>에는 베인이라는 악당이 등장한다. 그는 라스 알 굴의 의지를 이어 고담시를 정화하고자 한다. 그런데 그 방식이 너무도 급진적이다. 베인은 기존 질서를 완전히 무시한다. 법도 무시하고, 법을 집행하는 경찰도 무시한다. 왜냐하면, 부패했기 때문이다. (실제로 고담시는 악당보다 더한 경찰이 많았다) 그럼에도 자신의 행동이 정당하다고 생각한다. 베인은 당당히 이렇게 말한다. “사람들(people)에게 도시를 돌려주겠다.”
라스 알 굴과 베인의 행태는 위 트위터 글을 떠올리게 한다. 그는 스스로 악이 아니라 정의라고 생각한다. 당연히 죄책감이 없다. 따라서 적절한 제어 수단도 없다. 정의를 위해서라면 수백만 명의 고담 시민들을 죽음으로 몰아가도 괜찮다고 생각한다. 방식의 포악함을 생각한다면 빗나간 정의라고 볼 수밖에 없다. 그럼에도 정의이기에 반성할 필요성을 느끼지 못하고 폭주 기관차처럼 자신의 정의를 몰아붙인다.
그리고 이런 모습은 오늘날 인터넷 여기저기에서 어렵지 않게 목격할 수 있다. 정의라는 이름으로 입에 올리기도 무서운 말들을 서슴없이 내뱉는다. 명분이 생기면 상대방이 재기불능이 될 때까지 비난을 폭격처럼 쏟아붓는다. 과연 이게 정의로운 모습일까? 아니면 정의를 가장한 화풀이에 불과한 걸까?
3) <원더>, 올바름보다 친절함을 택하라
더 어려운 점이 있다. 무엇이 빗나간 정의일까? 그럼 빗나가지 않은 정의는 무엇일까? 성공하면 영웅이고, 실패하면 반역자라는 말도 있다. 정의는 언제나 상대적이었다. (보편적 정의라는 게 과연 가능할까? 있어도 매우 제한적이지 않을까?) 누군가의 처지를 온전히 이해하지 않는 한 무엇이 정의이고 무엇이 빗나간 정의인지 구분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하지만 그 처지를 온전히 이해해버리면 반대편의 정의를 객관적으로 볼 수 없기도 하다. 정의는 어렵고, 정답도 없다. 그저 끊임없이 반성하며 빗나가지 않기를 바라는 게 최선일 것이다.
빗나간 정의에 빠지지 않는 방법의 하나를 나는 영화 <원더>에서 찾을 수 있었다. 영화에는 이런 대사가 나온다. “올바름과 친절함 중에서 선택을 해야 한다면, 친절함을 택하라(When given the choice between being right or being kind, choose kind).”
우리는 무엇이 정의인지 구분할 수 없다. 하지만 무엇이 친절한지는 구분할 수 있다. 생각보다 쉽다. 상대를 아끼고 불쌍히 여기는 마음이면 충분하다. 맹자가 말했던 측은지심(남을 불쌍하게 여기는 타고난 착한 마음을 이르는 말)이 여기서 말하는 친절함이다. 만약 내가 생각하는 정의가 빗나간 정의인지 아닌지 궁금하다면, 이걸 꼭 생각해보자. 나의 정의는 과연 친절한가?
이러한 생각을 마음속 깊이 담아주고 삶의 신조로 삼는다면, 최소한 다른 사람에게 상처 주는 행동을 당당하게 저지르는 일은 막을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그런 사람이 더 많아졌을 때 우리 사회는 보다 관용적이고 따뜻하게 바뀔 수 있을 것이다. 독설과 미움이 가득한 인터넷이 아니라 친절함과 따뜻함이 퍼지는 인터넷 세상이 오길 바란다. 그러기 위해 우리, 조금 더 친절해지자.
참고
1) 깨달음을 얻은 어느 일본인, 이토랜드
2) @tokiko_dayon, 트위터
3) 영화 <슈퍼맨 3>, <더 보이>, <배트맨 비긴즈>, <다크 나이트 라이즈>, <원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