옳음과 친절함 중에서 하나를 선택해야 한다면?

어렸을 때는 올바른 것이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했다. 세상은 부조리함을 넘어 불의가 가득했고, 옳지 않은 일에 분개하는 것이 청년의 숙명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살면서 이런저런 일을 겪다 보니 마냥 옳음만을 추구하기가 어렵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내가 정의라고 생각한 일들이 다른 문화권에서는 불의가 될 수도 있고, 불의라고 생각한 일이 당연한 일이 될 수도 있었다.

 

예를 들면 우리나라에는 존댓말이 존재한다. 어렸을 때는 나보다 나이가 많은 사람에게 항상 존댓말을 써야 한다고 배웠다. 그래서 대학 시절까지도 형들에게는 항상 존댓말만 사용했다. 그런데 군대를 가보니 나보다 어린 사람이 고참인 경우가 있었다. 당연히 나보다 나이 어린 고참은 나에게 반말을 했다. 이전까지 나에게 불의였던 일이 군대에서는 당연한 정의가 되어 있었다. 외국인을 만났을 때도 비슷한 일을 겪었다. 그들에게는 존댓말이라는 개념 자체가 없었다. 아무리 나이 차이가 많이 나도 똑같은 언어를 사용한다. 이처럼 정의는 문화와 규범에 따라 언제든 달라질 수 있다.

 

나이가 더 들고나서는 정의를 부르짖는 것이 위험하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사회는 굉장히 복잡한 곳이다. 누군가에게는 올바른 일이 누군가에게는 부당한 일이 될 수도 있다. 처지가 달라지면 정의도 달라진다. 때로는 지극히 정의로운 사상도 너무나 급진적인 태도를 갖춰서 악의를 뿌리고 다니기도 한다. 정의를 위해 약자를 괴롭히게 된다면 과연 그것을 정의라고 부를 수 있을까?

이런 고민을 하던 와중에 <원더>라는 제목의 영화를 만나게 된다. 그리고 그 영화에 등장했던 대사 하나가 내 삶의 신조가 되었다.

 

 

 

정의는 문화와 처지에 따라 달라질 수 있지만, 친절 하고자 하는 마음은 어떤 상황에서도 항상 같았다. 남을 해하지 않고, 아끼고 사랑하려는 마음, 즉 이타주의야말로 세상을 이롭게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옳음과 친절함 중에서 하나를 선택해야 한다면, 친절함을 선택하는 게 낫다고 생각한다.

 

물론 친절하기만 해서는 안 된다. 지옥으로 가는 길은 선의로 포장되었다는 말도 있다. 아무리 의도가 좋아도 결과가 최악이라면 그것은 친절한 일이라고 볼 수 없을 것이다. 그래서 때로는 냉정한 판단이 필요할 수도 있다. 또한 마냥 이타주의적이면 호구가 될 수도 있다. 남을 돕고자 하는 마음에도 적절함과 지혜가 필요했다. 그래서 나는 이기적 이타주의자, 냉정한 이타주의자가 되고자 한다. 그래도 이 모든 생각의 바탕에는 이타주의, 남을 돕고자 하는 친절함이 깔려 있다는 사실은 변하지 않는다.

 

그래서 나는 <원더>의 대사를 여전히 나의 신조로 삼고 있다. 다만 몇 가지 단서를 더 붙여서 삼고 있다.

 

“옳음과 친절함 중에서 하나를 선택해야 한다면, 친절함을 선택하라. 단, 똑똑한 친절함이어야 한다.”

 

참고 : 영화 <원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