절대 포기할 수 없는 것

 

“이야~ 이거 영화로 만들어도 될 정도로 기막히네!”

 

사람들은 신기한 이야기를 보면 이렇게 감탄한다. 그런데 이 말을 뒤집으면 이렇게 생각할 수도 있다.

 

“기막힌 이야기가 아니면 영화로 만들기 어렵다.”

 

하긴 평범한 일상을 영화로 만들면 누가 봐줄까? 영화로 만들어지고 널리 흥행하는 이야기는 모두 신기하고 기발하다. 2억 5천만 년 전 공룡을 스크린에 부활시키기도 하고, 전대미문의 미제 사건을 재구성하기도 하며, 용과 마법이 펼쳐지는 판타지 세상을 구현하기도 한다. 하나같이 기막힌 이야기다.

 

그러나 기막힌 지점에 집중하다 보면 함정에 빠질 수도 있다. 개연성이 사라지고 작위적이라는 느낌을 준다. 처음 <소공녀>의 시놉시스를 보았을 때도 그랬다. 동화처럼 비현실적이라는 생각을 지울 수가 없었다.

 

주인공 미소는 독특한 취향을 가진 여성이다. 위스키 한 잔, 담배 한 모금, 그리고 사랑하는 남자친구. 이것이 그녀가 바라는 전부였다. 그녀는 가사도우미로 생계를 이어가고, 허름한 원룸에서 난방도 없이 겨울을 버텼지만, 궁핍한 처지에 비관하지 않았다. 그녀가 바라는 전부는 이미 손에 넣었으니까.

 

하지만 세월은 흘러가고 물가는 올라갔다. 월세도 오르고, 담뱃값도 오르고… 하루살이 인생이 마이너스 인생이 되어버렸다. 아무리 궁핍해도 빚지고는 못 살겠다는 미소는 중대한 결정을 내린다. 바로 집을 포기하는 것. 그렇게 그녀의 자발적 홈리스 생활이 시작된다.

 

미소는 친구 집을 전전한다. 이집 저집 기웃거리며 때로는 코믹한, 때로는 씁쓸한 더부살이 인생이 펼쳐진다. 그 와중에도 위스키와 담배 사랑을 멈추지 않는 미소. 그런 그녀에게 한 친구가 말한다.

 

“그 사랑 참 염치없다.”

 

그렇게 더부살이도 여의치 않아지자, 미소는 새 보금자리를 구하고자 한다. 하지만 서울의 살인적인 물가는 그녀에게 안주할 거처를 허락하지 않았다. 결국, 미소는 집을 포기한다. 강변에 텐트를 치고 완벽한 노숙 생활에 들어간다. 여전히 위스키와 담배를 즐기면서…

 

집을 포기한다? 그것도 능동적으로? 솔직히 공감하기 어려웠다. 보증금과 월세에 한숨짓는 청년들의 심정에는 공감했다. 아파트를 구해놓고 수십 년 만기 대출금에 눈물짓는 직장인의 심정에도 공감했다. 심지어 부잣집에 시집가서 눈치 보며 사는 삶에도 공감할 수 있었다. 하지만 집을 포기하는 것만큼은 좀처럼 공감하기 어려웠다. 위스키와 담배 vs 집. 과연 무엇을 포기하는 게 마땅한가? 누가 뭐래도 몸에 나쁜 술, 담배가 포기 1순위 아닐까?

 

나에게도 집은 중요한 목표다. 

 

“우선 둘 다 멀쩡한 직장을 구하고 나서 생각하자.”

 

다행히 좋은 직장에 다니게 되었고, 안정적인 수입을 얻게 되었다. 단칸 짜리 월세방에서 결혼 생활을 시작하기는 싫다. 그렇게 월세 다 내면서 언제 돈을 모으나. 전세라도 구해야 한다. 하지만 그것도 한두 푼이 아니더라. 전세조차 ‘억’ 소리가 나오는 판국이니 과연 언제쯤 함께 살 집을 구할지 까마득하다. 그렇게 집이라는 가치에 목멘다. 보통의 한국 사람처럼 ‘내 집 마련’을 꿈꾼다. 그런 나에게 미소의 자발적 노숙은 정말 이해하기 어려웠다.

 

그래서 작위적으로 다가왔다. 속 편한 소리처럼 느껴졌다. 낭만 타령이라 생각했다. 재밌는 이야기일지언정, 인생의 깊이를 담고 있다고 생각지는 않았다. 그러다 문득 다른 생각이 들었다. 내가 너무 편협하게 생각하는 건 아닐까? 미소를 철없게만 바라보는 꼰대가 된 게 아닐까? (그런데 미소와 나는 나이가 비슷하다) 그리고 번뜩 느끼는 바가 있었다. 그 이야기를 적어보고자 한다.

 

 

 

1. 절대 포기할 수 없는 것은?

 

지금은 내 집 마련이 절대 포기할 수 없는 가치지만, 과거에는 그 자리에 다른 목표가 있었다. 학창 시절 나의 목표는 ‘좋은 대학’이었다. 다른 모든 수험생과 마찬가지로… (그때나 지금이나 나는 남들처럼 살고 싶어 한다) IMF를 겪으며 가정이 무너지고 사회가 무너지는 현실을 뼈저리게 느꼈다. 좋은 대학을 못 가면 40만 청년 실업 시대에 살아남을 수 없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기를 쓰고 공부했고, 나름 좋은 대학에 입학할 수 있었다.

 

그런데 세상이 변했다. 청년 실업은 40만을 넘어 100만까지 치솟았다. 대학 간판 좋다고 취업이 보장되는 시대가 아니었다. 결국, 좋은 대학을 나와서 백수가 되었다. 지금은 전공과 전혀 무관한 일자리를 구했다. 그래서 고3 딸 아이를 둔 사촌 누나에게 이런 소리도 했다.

 

“대학 간판 그거 아무 쓸모 없다. 세상이 변했어.”

 

그런데 왜 나는 대학을 포기하지 못했을까? 좋아하는 일을 더 일찍 시작했다면 좋은 성과를 낼 수 있지 않았을까? 그 비싼 등록금을 내며 대학을 다녀야만 했을까? 트라우마로 남을 정도로 심각한 스트레스를 받으며 졸업장을 받아야만 했을까? (아직도 종종 졸업 못 하는 꿈을 꾼다) 과연 졸업장에 절대 포기할 수 없는 대단한 가치가 있었을까?

 

집을 포기한 미소의 선택에는 여전히 반대한다. 나는 내가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 살 집이 필요하니까. 하지만 집마저도 포기의 대상에 올려놓은, 그 사고의 유연함은 닮고 싶다. 과연 나는 무언가를 추구하거나 포기할 때 나만의 생각을 가진 적이 있던가? 남들 다 하니까, 그 뒤꽁무니 좇으며 살아온 건 아닐까? 과연 한 번이라도 인생을 진지하게 생각해 본 적이 있나? 내 인생에서 포기해야 할 것이 무엇인지 냉철하게 분석한 적이 있나? 미소의 선택을 보며 반성하게 된다. 그리고 이런 결론을 얻었다.

 

‘절대 포기할 수 없는 것은… 없다!’

 

세상이 정해 놓은 규칙에 얽매여 살아갈 필요는 없다. 내가 진짜로 원하는 게 무엇인지 알아야 하고, 나에게 진짜로 필요한 게 무엇인지 파악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어떤 것이라도 필요하다면 과감히 포기할 수 있어야 한다. 과연 더 나은 삶을 위해, 성장하기 위해 나는 무엇을 포기할 수 있을까? 어디까지 포기할 수 있을까? 그 한계를 미리 정해놓을 필요는 없다고 생각한다.

 

 

2. You Only Live Once, YOLO, 욜로… 과연?

 

미소는 집을 포기했다. 대신 위스키와 담배를 선택했다. 사람마다 꿈꾸는 바가 다르다. 각자가 추구하는 이상이 다르다. 집은 없어도 생각과 취향은 있다. 이를 존중하는 사회가 되기를 바란다. 그 안에서 당당하게 살아가길 바란다. 미소처럼… 영화 <소공녀>는 타인의 시선에 구애받지 않는 당당함을 이야기한다. 자신만의 작은 행복을 추구하라고 말한다. 이런 맥락에서 근래 유행했던 ‘욜로’라는 단어가 떠올랐다.

 

사실 욜로는 우리나라로 건너오면서 뜻이 왜곡되었다. 원래는 ‘뒷일은 생각하지 않는 자세’를 뜻하는 말이다. 우리말로 하자면 ‘죽기밖에 더하겠어?’라는 말과 유사하다. 객기나 위험한 행동을 합리화하는 식으로 사용되기도 한다. 그런데 이 말이 미래가 불투명한 대한민국 청년층을 자극하면서 긍정적인 의미를 갖게 되었다. 미래를 위해 행복을 유예시키더라도, 노력한 만큼의 행복을 돌려받기 어려운 현실. 그 안에서 뒷일을 도모하기는 어렵다. 대신 눈앞의 작은 행복, 즉 ‘소소하지만 확실한 행복’을 추구한다. 그렇게 욜로는 ‘카르페디엠’, ‘소확행’ 등으로 변주되었다.

 

하지만 이런 자세가 과연 행복을 가져다줄 것인지 의문이 남는다. 미소는 집을 포기하고 노숙을 택했다. 과연 이 선택을 오래 지속할 수 있을까? 영하 20도까지 내려가는 한파 속에서도 텐트 생활이 가능할까? 여자 혼자 강변에서 생활하는 것은 위험하지 않을까? 그렇게 살다가 덜컥 병이라도 걸리면 어쩌지? 영화는 이러한 걱정을 슬그머니 외면한다. 하지만 현실에서는 ‘설마’를 없앨 수도, ‘갑자기’를 뺄 수도, ‘만약’을 지울 수도 없다. 오늘의 행복을 추구하는 게 나쁜 것은 아니다. 하지만 오늘의 행복이 지속 불가능하다면? 그럼에도 ‘욜로’를 외치는 것은 자신에게 무책임한 일이 아닐까?

 

절대 포기할 수 없는 것은 없다. 무엇이든 꿈꿀 수 있고, 어떤 것이라도 포기할 수 있다. 그렇다고 아무거나 꿈꾸고, 아무거나 포기해도 된다는 말은 아니다. ‘소확행’도 마찬가지다. 작은 행복을 추구하는 것은 바람직한 일이다. 그런 태도를 갖추면 마음이 여유로워지고, 일상이 편안해진다. 그렇다고 작은 행복을 위해 현실을 내팽개치라는 말은 아니다. 스트레스 가득한 현실 속에서 작은 행복을 찾아 위안을 얻으라는 말로 받아들여야 옳다.

 

그럼 포기해도 되는 것과 포기해선 안 되는 것의 기준은 무엇일까? 나는 두 가지를 꼽고 싶다. ‘지속’과 ‘성장’이다. 내일도 모레도 지속할 수 있는 행복, 그리고 이를 추구하면서 자신을 성장시킬 수 있는 것. 예를 들면 미소의 남자친구가 도전했던 웹툰이 있다. 직장을 다니며 웹툰을 그리는 것은 지속 가능한 일이다. 그리고 그림 실력은 계속 성장할 것이다. 언젠가 빛을 보게 될지도 모른다. 그러나 집을 포기하는 일은 지속하기 어려워 보인다. 위스키와 담배는 성장과 무관하다.

 

그럼에도 미소의 선택은 존중받아야 한다. 그것은 개인의 자유이기 때문이다. 남이 뭐라고 훈계할 사항이 아니다. 그렇다고 그 선택이 옳은 것은 아니다. 영화는 존중을 강조하기 위해 극단적인 취향(지속과 성장이 없는)을 내세웠겠지만, 그것이 현실을 외면하는 지나친 낙관주의로 빠질 수 있기에 아쉬울 따름이다. 그래서 이 영화를 보고 ‘욜로’를 외치는 사람이 없기를 바란다. 그것은 무책임할 정도로 무비판적인 감상이 아닐까?

 

미소의 삶은 영화처럼 아름답고, 영화처럼 슬프다. 달리 말하자면 비현실적이고 작위적이다. 한 편의 동화처럼 다가온다. 그럼에도 이 영화가 울림을 주는 이유는 이를 통해 현실을 돌아보게 만들기 때문이다. 미소의 삶이 올바른 방향으로 나아간다고 보기는 어렵다. 하지만 우리 삶을 올바르게 나아가도록 고민하는 계기를 마련해준다. 나는 이런 게 좋은 픽션이라고 생각한다. 정답을 말해주지 않지만, 정답을 고민하게 만든다. 인생에 정답이란 없다. 그렇다면 정답을 고민하게 만드는 것만으로도 픽션의 역할은 다 한 것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