혹시 이 글을 읽고 있는 이 순간 친구나 동료가 옆에 있다면 먼저 한 가지 게임을 해보기를 추천합니다. 물론 나중에 해도 좋습니다. 다음에 열거된 노래를 입으로 하지 않고 박자를 따라 책상이나 탁자를 두드려보십시오. 그리고 친구에게 그 박자가 어떤 노래의 박자인지를 맞추게 해보는 것입니다.
– 애국가
– 여러분
– 학교종이 땡땡땡
– 생일 축하합니다
– 강남 스타일
여러분은 친구가 몇 개를 맞출 수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스탠퍼드대학교 엘리자베스 뉴턴은 이와 비슷한 실험을 했습니다. 그녀는 두 그룹으로 실험참가자를 나누고 한 그룹은 노래의 리듬을 탁자에 두드리고 다른 그룹은 그 리듬만을 듣고 노래 제목을 맞추도록 했습니다. 두드리는 노래는 약 120곡으로 미국인이라면 거의 다 아는 노래로 구성되었습니다.
실험 결과 평균적으로 맞춘 곡의 수는 겨우 3곡에 불과했습니다. 3곡도 리듬을 들어서 제대로 유추했다기보다 거의 찍어서 맞췄다는 표현이 더 어울릴 정도였습니다. 그런데 이 실험의 진수는 그 전 노래의 리듬을 두드리는 사람에게 제가 여러분에게 물어봤던 것처럼 다른 사람이 몇 개의 곡을 맞출 수 있는지를 물어보는 데에 있었습니다. 노래를 두드렸던 그룹은 무려 50퍼센트나 상대방이 맞출 것이라고 예상했습니다.
이런 현상이 왜 발생하는 지는 실제로 게임을 해보면 압니다. 저도 20대 때 친구들과 이 게임을 하면서 정말 신기했던 경험을 했는데 박자를 두드리는 사람은 노래를 떠올리면서 해야 하기 때문에 노래 멜로디가 선명하게 머리 속에 들어옵니다. 하지만 탁자 소리를 듣는 사람은 멜로디나 가사는 없고 그저 ‘딱딱’ 소리만 일정 간격으로 들리기 때문에 노래가 아니라 모스부호와 같이 들리게 되는 것입니다.
이때 탁자를 두드리는 사람이 ‘지식의 저주’에 빠졌다고 표현합니다. 내가 알고 있는 것을 상대방이 모를 수 있다는 사실을 모르는 것이죠. 메타 인지는 나에 대한 지식에 대한 것이라면 지식의 저주는 타인에 대한 지식과 관련된 것입니다. 상대방이 무엇을 알고 있으며 어떤 상태이고 어떤 사람인지에 관한 것이죠. 우리는 스스로에 대한 지식도 부족하지만 상대방을 이해하는 데에도 부족한 면이 많습니다. 왜냐하면 대부분 상대방 중심적으로 사고하는 것이 아닌 내 중심적으로 사고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상대방이 나와 다를 수 있음을 잊을 때가 많기 때문입니다.
지식의 저주에 잘 빠지는 부류는 전문가 집단입니다. 인간은 무언가를 알면 자신이 무언가 모르는 상태를 망각합니다. 특히 교수나 교사가 학생들을 가르칠 때 학생들이 뭘 모르는지를 모르는 상태에서 강의를 하게 되면 학생들은 흥미를 잃게 됩니다. 강사는 당연히 이 정도는 알겠지라는 생각으로 열변을 통하지만 실제 청강자는 모르는 상태일 경우가 많기 때문입니다. 지식의 저주에 빠진 셈이죠.
그래도 교사는 교육학을 배우는 사람이기 때문에 그런 경우가 적지만 대학교 교수는 매우 심각합니다. 무엇을 잘 아는 것과 무엇을 잘 가르치는 완전히 별개의 문제입니. 하지만 일단 무엇을 잘 알면 잘 가르칠 수 있다고 착각합니다. 게다가 상대방에 대한 이해도 부족합니다. ‘메타인지’ 부족과 ‘지식의 저주’가 만나는 경우를 저는 대학 강단에서 너무나 많이 느꼈습니다. 물론 그것 때문에 제가 대학을 그만둔 것은 아닙니다. 하지만 ‘내가 이러려고 대학에 왔나. 자괴감이 든다.’라는 생각을 대학생활 하면서 무척이나 많이 했죠.
물론 이러한 현상은 교육계에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지식의 저주는 가정에서, 직장에서, 친구 간에 빈번하게 발생하고 있습니다. 반성컨대 저 또한 ‘지식의 저주’에 가끔 빠지나 친구와의 한 사건을 겪은 후로 이를 극복하기 위해서 노력을 많이 하게 되었습니다. 다음은 <완공>에 나온 저의 ‘지식의 저주’ 이야기입니다. 그대로 옮겨보겠습니다. 여러분은 부디 ‘지식의 저주’에 빠지지 않기를… (<완공> 79~80p.)
10년 전에 친구와 야구에 관해 이야기한 적이 있었다. 한참 떠들어대고 있는데 이상하게 친구의 표정이 좀 멍한 것이다. 나는 ‘녀석이 좀 피곤한가?’라고 생각하고 계속 말을 이어갔다. 갑자기 친구가 불쑥 물었다.
“도루가 뭐야?”
나는 순간 멍해졌다.
“아니, 진짜 몰라서 묻는 거야?”
“응, 정말 몰라서 묻는 거야.”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어떻게 남자가 도루를 모를 수 있냐?”
친구는 처음으로 나에게 얼굴을 붉히고는 기분이 많이 상한듯 집에 간다며 가버렸다. 친구의 빈자리를 보며 당황했지만 이내 좀 더 깊게 생각해 보았다. 나는 도루같은 야구의 기본용어들은 너무나 상식적인 것이라고 생각했기에 성인 남자가 모른다는 것은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다. 그래서 친구가 멍하게 있을 때조차 피곤해서 그렇지 몰라서 그런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더구나 그 친구는 정말 아는 게 많았다. 특히 동식물에 대해서는 내 주변에서 가장 깊은 지식을 가지고 있는 친구였다.
‘혹시 내가 모르는 어떤 동물이나 식물이 그 친구에게는 너무 상식적인 것은 아닐까?’
나는 ‘지식의 저주’에 빠져 있었던 것이다. 평소 그 친구의 능력을 높이 평가했음에도, 그 순간 ‘지식의 저주’에 빠져 친구를 무시했던 것을 깨닫고 너무 미안했다.
‘지식의 저주’에서 벗어나기 위해서는 최대한 듣는 사람의 입장이 되어야 한다. 그래서 지금 내가 보내는 메시지가 때로는 그에게 ‘따딱’소리만 나는 모스부호와 같다는 것을 알아야한다. 그리고 듣는 이가 알아들을 수 있게 합당한 멜로디로 불러주어야 한다. 비로소 그때 ‘지식의 저주’는 사라지고 우리는 서로 소통하며 축복을 누릴 수 있다.
그날 이후 나는 변했다. 그 친구와 간혹 스포츠에 대한 이야기를 할 때면 조금 신경을 써서 용어를 풀이해 주거나 상황을 좀 더 구체적으로 이야기한다. 친구를 위해 멜로디를 불러주는 것은 정말 좋은 일이니까.
그리고 우리는 여전히 베스트 프렌드이다.
참고 <완벽한 공부법>, 고영성·신영준 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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