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영화를 보자마자 입에서 한 마디가 튀어나왔다.
“미쳤다.”
그 어떤 미사여구도 필요치 않다. 이 한 단어면 <위플래쉬>를 표현하는 데 부족함이 없다. 미친 스승과 미친 제자의 광기 어린 충돌을 보여주는 영화가 바로 <위플래쉬>다.
<위플래쉬>를 미친 영화로 만든 1등 공신은 누가 뭐래도 테런스 플레처 교수다. 그는 등장부터 카리스마 넘치는 모습을 보여준다. 친절함과는 거리가 멀었고, 독설의 경계를 건드리는 화법도 인상적이었다. 하지만 그게 전부가 아니었다. 앤드류가 처음으로 플레처의 밴드에 합류한 날. 그는 박자가 맞지 않는다며 앤드류를 몰아세운다. 입에 담기도 힘들 욕설을 퍼붓고 나중에는 뺨을 때리는 폭력까지 행사한다. 완벽한 연주를 위해서는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최악의 폭군, 그게 바로 테런스 플레처였다.
플레처가 이토록 매몰차게 학생을 몰아붙이는 이유는 무엇일까? 본인 스스로는 확고한 철학을 가지고 있었다. 그는 영어에서 가장 해로운 두 단어가 “Good job, 그 정도면 잘했어.”라고 말한다. 평범하게 잘하는 것으로는 부족하며, 한계를 돌파하기 위해 학생들을 몰아붙여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자신의 가혹한 교육방식을 사과할 생각도 없다고 한다. 그는 악마 같은 선생이었지만, 그냥 악랄한 것이 아니었다. 자신만의 ‘신념’을 가진 악마였다.
주인공 앤드류 네이먼도 미친 놈이기는 매한가지다. 그도 처음에는 순진한 대학 신입생이었다. 그러나 플레처의 가르침 아래에서 점차 광기를 드러내기 시작한다. 그 시작은 첫 경연날이었다. 네이먼의 실수로 악보를 잃어버렸고, 메인 드러머는 악보가 없이는 연주를 할 수 없다고 버텼다. 그 순간, 네이먼이 나선다. 자신은 악보를 전부 외웠다며 대신 무대에 서겠다고 말한다. 그렇게 셰이퍼 음악학교 최고의 팀에서 메인 드러머의 자리에 오르게 된다. 영화는 이 장면을 모호하게 서술한다. 악보가 어디로 사라진 것인지 그 진상을 명백하게 보여주지 않는다. 혹시 모르는 일이다. 네이먼이 메인 자리에 오르기 위해 악보를 일부러 감췄을 수도 있다. 그 깨름칙한 느낌은 뒤로 가며 광기가 되어 돌아온다.
다음 경연 곡은 ‘캐러밴’이었다. 그런데 플레처는 네이먼에게 쉽사리 메인 자리를 맡길 생각이 없어보였다. 다른 밴드의 드러머까지 불러와 메인 자리를 두고 경합하도록 만들었다. 네이먼은 최고가 되기 위해 피나는 노력을 한다. 비유적으로 하는 말이 아니라 정말로 손이 피범벅이 될 정도로 연습한다. 게다가 여자친구에게 자신의 꿈에 방해가 된다며 헤어지자고 말하기도 한다. 이쯤되면 어딘가 사고 방식에 문제가 생긴 게 아닌가 하는 의구심마저 들 정도다.
그렇게 애인도 차버리는 피나는 노력 끝에, 네이먼은 마침내 메인 자리를 꿰차게 된다. 하지만 운명은 그에게 행복한 미래를 허락하지 않았다. 경연장으로 향하는 버스가 펑크가 나고 네이먼은 급하게 차를 빌려 경연장에 도착한다. 하지만 차량 대여소에 드럼 스틱을 놔두고 오는 실수를 저지르고, 다시 미친 듯이 차를 몰아 스틱을 가져오지만, 그 와중에 교통사고까지 당하고 만다. 피를 철철 흘리며 무대에 섰지만, 제대로 된 연주를 할 리가 만무하다. 네이먼은 고개를 숙인 채 좌절하고 그 위로 플레처의 차가운 대사가 쏟아진다.
“넌 끝났어.”
분노에 사로잡힌 네이먼은 플레처에게 주먹을 휘두른다. 나중에는 플레처의 가혹한 교육방식을 위원회에 고발하고 그 결과 플레처가 교수 자리를 박탈당하도록 만든다. 스승과 제자가 철천지원수가 되는 순간이었다.
이처럼 두 미친 사내가 서로를 물어뜯지 못해 안달 난 상황을 만들었지만, 영화의 결말은 의외로 두 사람이 의기투합하는 모습을 보여준다. 학교에서 쫓겨난 두 사람이 우연히 재즈바에서 마주한다. 플레처는 네이먼에게 자신의 새 밴드에 들어오라는 제안을 건네고, 덕분에 네이먼은 꿈에 그리던 카네기 홀에 오를 수 있었다.
하지만 이 모든 게 플레처의 함정이었다. 그는 네이먼이 자신을 고발한 사실을 알고 있었다. 복수를 위해 네이먼이 본 적도 없는 곡을 연주했고, 네이먼은 수많은 관중 앞에서 실력 없는 드러머로 낙인찍히며 경력이 박살 나는 상황에 이른다. 네이먼은 플레처에게 복수하기로 마음 먹는다. 다짜고짜 무대에 올라 플레처의 사인도 없이 ‘캐러밴’을 연주하기 시작한 것. 이 기묘한 복수전이 굉장한 긴장감을 불러일으킨다. 연주라기 보다는 스포츠처럼 느껴질 정도로, 두 사람의 심리전이 팽팽하게 당겨져 당장이라도 끊어질 것 처럼 아슬아슬하게 다가온다.
하지만 그 끝에서 네이먼과 플레처는 의기투합한다. 한계를 넘어선 절정의 경지에서 두 사람은 음악가로 이심전심한다. 이 결말 또한 기묘하게 다가온다. 영화는 내내 플레처의 비인간성을 고발하더니, 마지막에 가서는 위대한 음악적 순간을 보여준다. 무엇이 옳고 그른지 정답을 제시하지 않는 열린 결말인 셈이다.
<위플래쉬>는 어느 방향으로 바라보느냐에 따라 전혀 다르게 다가오는 작품이다. 그 중심에는 플레처의 교육 철학이 있다. 그는 위대한 실력을 갖추기 위해 학생을 한계까지 몰아붙여야 한다고 주장한다. 이를 위해 폭언과 폭력도 마다하지 않는다. 이것만으로도 충분히 멘탈이 부서질 것 같은가? 플레처는 한술 더 떠 사람을 갖고 노는 경지에 이른다. 뒤에서는 힘내라고 띄워주다가, 앞에서는 온갖 모욕을 주며 자존심을 바닥에 내리꽂는다. 자극을 주기 위해 경쟁을 부추기기도 하고, 그 안에서 피도 눈물도 없는 냉혈한의 모습까지 보여준다.
앤드류 네이먼은 그런 플레처의 교육 철학을 잘 따라갔다. 그가 홀로 연습하는 처절하기 그지없다. <위플래쉬>만큼 임계점 돌파의 현장을 시각적으로 생생하게 구현한 영화는 없다고 생각한다. 얼음이 가득한 물에 피투성이 주먹을 넣는 모습은 너무나 생생한 충격이었다. 그렇게 피 나는 수련의 결과 네이먼은 위대한 음악적 순간을 경험하게 된다. 환희 가득한 마지막 연주를 보노라면 플레처의 교육 방식이 틀리지 않았다는 생각이 든다.
그러나 어디에나 ‘선’이라는 게 있다. 네이먼은 플레처의 압박을 견뎌냈지만, 다른 학생은 이를 견디지 못하는 경우도 있었다. 심지어 졸업 후에도 우울증에 시달리다 자살하는 경우도 있었다. 확실히 플레처의 교육 방식은 선을 넘었다. 학생을 몰아붙이는 것도 필요하겠지만, 그러다가 사람이 죽어버리면 무슨 소용이란 말인가?
그렇기에 <위플래쉬>를 두고 한계를 극복한 아름다운 미담으로 해석하는 것은 위험하다고 생각한다. 영화는 네이먼의 피나는 노력을 적나라하게 보여주지만, 이를 아름다운 열정으로 포장하지 않는다. 오히려 인정받고자 하는 욕망, 승부욕으로 표현한다. 인간 내면의 어두운 곳에 존재하는 욕망의 발현인 셈이다. 어쩌면 그렇게 어두운 욕망을 품었기에 플레처의 폭력을 견딜 수 있었는지도 모른다. 순수하게 음악을 사랑하는 사람이었다면 그 모욕과 폭력에 오히려 사랑하는 마음이 사라져버렸을지도 모를 일이다.
임계점을 돌파하는 노력이 무엇인지 <위플래쉬>만큼 잘 보여준 영화는 없다고 생각한다. 동시에 그 노력을 강요하는 폭력이 얼마나 무서운 것인지 보여주는 영화이기도 하다. 과연 우리는 무엇을 위해 노력하는 걸까? 행복하기 위해 열심히 사는 것 아닐까? 그래서 영화의 열린 결말이 숙제처럼 다가온다. 과연 성공과 행복이 양립하려면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 할까? 그 고민 거리를 화두로 던진 것. 그게 영화 <위플래쉬>의 진정한 의미라고 생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