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바름과 친절함 사이에서 하나를 골라야 한다면 친절함을 선택하라. 나는 이 말을 삶의 신조로 삼고 있다. 왜냐하면, 올바름은 절대적이지 않기 때문이다. 내가 정의라고 생각하는 일이 다른 문화권, 다른 시대에서는 불의가 될 수도 있다. 하지만 친절함은 문화와 시대에 따른 차이가 작다. 물론 의도만 좋고 결과가 시궁창이라면 그것도 문제지만, 최소한 친절하고자 하는 의도는 상대를 악으로 몰아세우지는 않는다. 그래서 나는 친절함에 더 높은 우선순위를 둔다. 그런데 어떤 댓글을 보고 친절함을 골라야 할 또 하나의 이유를 찾게 되었다.
한 인터넷 게시판에 어떤 여학생의 안타까운 사연이 올라왔다. 현재 예비 고3이지만, 집안 사정이 어려워서 포기하고 사는 게 많았다고 한다. 친구들이 놀이공원을 가자고 해도 핑계 대면서 빠지고, 공책 살 돈도 없어서 분리수거함에서 쓰다 남은 걸 주어 올 때도 있었다고 한다. 그런데 이번에 반 회식이 열려서 5,000원이 필요했단다. 그래서 어머니께 줄 수 있냐고 부탁했더니, 어머니가 전에 준 용돈은 어쨌냐고 화를 냈다고 한다. 딸은 그게 너무 서러워서 쌓여 있던 게 폭발해버렸고 그만 어머니께 버럭 소리를 질렀다고 한다.
사실 여학생의 행동을 잘했다고 보기는 어렵다. 여학생도 딱히 ‘저는 잘못한 게 없어요.’라는 말을 하기 위해 글을 올린 것은 아니다. 그냥 어딘가 하소연하고 싶었던 것 같다. 그런데 이 글에 달린 댓글에 그만 울컥하고 말았다.
이 댓글을 본 여학생의 심정은 어땠을까? 제일 먼저 고마움을 느꼈을 것 같고, 그리고 나면 어머니께 미안한 마음이 들었을 것 같다. 만약 이 학생에게 “힘들수록 가족끼리 서로 아껴야지, 어디 버릇없게 부모님께 큰소리치나?”라고 한다면 어땠을까? 아마 반발심이 더 강하게 들지 않았을까?
소통과 관련한 책을 보면 조언할 때는 먼저 상대방의 사정을 이해하는 게 중요하다고 한다. 상대방의 힘든 점, 억울한 부분을 먼저 들어주고, 그다음에 조언해야 상대를 설득할 수 있다고 한다. 위의 댓글에서 보여준 친절함도 이와 같다고 생각한다. 사는 게 힘들다 보면 실수할 수도 있다. 그 안타까운 심정을 먼저 알아준다면, 아마도 어머니께 그러면 안 된다는 마음이 저절로 솟아날 거라 생각한다.
흔히 상대가 원하지 않는 조언을 하면 꼰대라고 부른다. 그렇다고 꼰대가 되기 싫어서 꼭 필요한 피드백을 무시하고 넘어가서는 안 된다. 좋은 리더, 좋은 어른이 되려면 올바른 것을 넘어 상대를 감화시킬 줄 알아야 한다. 그래야 거부감 없이 피드백을 전할 수 있다. 나는 저 댓글을 통해 이를 이룰 수 있는 구체적인 방법의 하나를 배웠다고 생각한다. 아마 살다보면 (특히 자식이 생긴다면) 누군가를 혼내야 할 일이 생길 것이다. 그럴 때 혼내기 전에 내가 친절할 수 있는지 먼저 살펴보는 자세를 갖고자 한다. 나는 그게 좋은 어른이라고 생각한다.
참고 : 나 엄마한테 첨으로 소리지름, 네이트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