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 덕후가 되어야 하는가?
넷플릭스 콘텐츠 최고책임자(COO) 테르 사란도스, 천재 감독 쿠엔틴 타란티노. 두 사람은 공통점이 있다. 둘 다 비디오 가게 점원으로 일한 경험이 있다. 테드 사란도스는 ‘가게에 있는 영화를 전부 다 보겠다’고 다짐하고, 진짜로 실천했다. 쿠엔틴 타란티노도 비디오 가게에서 일하는 동안 장르나 완성도를 불문하고 닥치는 대로 영화를 보았다. 테드는 살아있는 영화 검색엔진이 되어서 고객들에게 맞춤 영화를 추천하기 시작했다. 쿠엔틴 타란티노는 걸어 다니는 영화 백과사전이 되어서, 누구도 들어본 적 없는 감독과 배우의 이야기를 술술 풀어낸다.
이 둘은 진정한 ‘덕후’라고 할 수 있다. 좀 더 고급지게 표현하자면 이들은 친숙한 것, 좋은 것, 진부한 것을 실시간으로 파악하는 ‘문화적 인식’을 개발했다. 문화적 인식은 어떤 아이디어가 크리에이티브 커브에서 어디쯤 있는지 식별하는 능력이기도 하다. 이 능력을 얻어야 그 분야에서 성공할 수 있다. 그리고 이 능력을 얻는 방법은 바로 ‘소비’다.
성공의 가성비를 찾아라
어떤 분야를 잘 안다는 것은 무엇일까? 예전에 씽큐베이션 토론에서 나왔던 이야기를 예로 들어보자. 만약 당신이 컴퓨터 하드웨어 덕후라면 다음 질문에 바로 대답할 수 있어야 한다. “지금 가성비가 가장 좋은 CPU는 무엇입니까?” 딱 하나만 고르라면 어렵겠지만, 2~3개 정도 고르라고 하면, 가격대별로 추천 CPU를 줄줄 읊을 수 있어야 한다. 생각해보면 이는 굉장히 고차원적 사고의 결과다. 통계적 사고, 맥락적 사고, 재무적 사고가 결합된 결과다. 만약 당신이 어떤 분야를 잘 안다면, 최소한 이 정도는 할 수 있어야 한다.
크리에이티브 커브에서 가장 잘 팔리는 아이디어가 위치한 곳을 ‘스위트 스폿’이라고 한다. 가성비가 가격 대 성능 사이에서 최고의 효율을 보여주는 지점을 가리킨다면, 스위트 스폿은 친숙함 대 참신함 사이에서 최고의 효율을 보여주는 지점을 가리킨다. 어떤 분야를 잘 알면 최고의 가성비를 가리키듯, 스위트 스폿도 가리킬 수 있다. 덕후라면 당연히 할 수 있다. 즉, 많은 소비는 당연하게 스위트 스폿을 찾아내게 한다. 명심하라. 아무것도 모르는 상태에서는 결코 통찰력을 가질 수 없다. 하지만 넘치도록 많이 알면 가지기 싫어도 통찰력이 생긴다. 그래서 잘 알고 싶으면 덕후가 되어야 한다.
어떻게 소비할 것인가?
소비는 크리에이티브 커브를 파악하는 통찰력을 제공한다. 하지만 무작정 관찰한다고 통찰력이 생기는 것은 아니다. 게다가 백수도 아닌데 주야장천 소비만 할 수도 없는 노릇이다. (그런 면에서 비디오 가게 직원은 소비에 최적화된 직업이다!) 그래서 다음과 같이 “소비할 때 지켜야 할 것들”을 제시하고자 한다.
1) 의식적 소비
무작정 관찰한다고 통찰력이 생겼으면, 우리 엄마는 드라마 천재가 되었어야 한다. (향후 전개 각 보시는 건 천재급 맞긴 하시다 ㄷㄷ) 하지만 예능과 드라마를 섭렵한다고 그 분야의 천재가 되진 않는다. 의식적 소비를 하지 않기 때문이다. 책에서는 ‘현재 속한 분야’나 ‘연관성이 높은 자료’를 중심으로 소비하라고 조언한다. 이는 계독을 의미한다. 나는 여기에 패턴을 찾으려는 의식을 가지고 소비하라는 조언을 추가하고 싶다. 이는 관독을 의미한다. 무작정 소비하지 말고 계독과 관독의 관점을 가지고 의식적으로 소비해야 한다. 그래야 통찰력을 얻을 수 있다.
2) 아웃풋 소비
계독과 관독을 거친다고 끝나지 않는다. 아쉽게도 우리의 기억은 망각 곡선을 따른다. 번뜩이는 아이디어도 까먹으면 말짱 도루묵이다. 그러니 기록해야 한다. 아웃풋 소비가 이루어져야 한다. 가장 좋은 아웃풋은 내가 소비한 것에 관한 리뷰를 쓰는 것이다. 즉, 기록하라. 그러면 해당 콘텐츠를 자세히 분석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여러 콘텐츠 사이의 패턴을 파악하기도 쉽다. 예를 들면, 최근 넷플릭스 인기작들의 특징은 뻔한 시나리오에 참신한 소재나 미장센을 더하는 것이다. 클리셰 범벅이지만, 지루함의 마지노선을 절대 넘기지 않는다. 이런 패턴은 웬만한 넷플릭스 덕후도 쉽게 파악하지 못한다. 리뷰하고 분석하는 자만이 알 수 있는 영역이다. (이렇게 얻는 깨달음을 ‘느린 예감’이라고 부른다)
리뷰가 부담스럽다면 간단한 한 줄 평을 남기는 것도 좋다. 이럴 때 좋은 것이 소셜 미디어다. 페이스북이든, 인스타그램이든 소비한 것에 관한 짧은 평을 남겨보자. 진짜 간단한 방식이지만, 그 효과는 정말 크다. 더불어 ‘아하!’의 깨달음도 남기면 좋다. 떠올렸을 때는 무릎을 탁 치던 생각도 시간이 지나면 까먹는다. 하지만 한 줄의 단서라도 남겨 놓으면 나중에 찾아볼 수 있다.
3) 소비는 즐거워야 한다
왜 처음에 ‘덕후’를 언급했을까? 소비하는 태도가 덕후 같을 때 최고의 효과를 발휘할 수 있기 때문이다. 기왕 소비할 거면 공부나 일이라고 생각하지 말고, 휴식이나 놀이라고 생각하면 좋다. 특히 놀이가 되면 통찰력은 물론 엄청난 암기력까지 얻을 수 있다.
리그오브레전드(이하 롤)를 예로 들어보자. 이 게임에는 무려 155명의 챔피언 캐릭터가 존재하고, 이 챔피언들이 쓸 수 있는 아이템은 거의 200여 개에 달한다. 재밌는 건 롤 좀 하는 사람이라면, 심지어 초등학생이라도, 이 모든 챔피언과 아이템의 이름, 특성, 효과를 전부 암기하고 있다는 점이다. 게다가 상황과 맥락에 따라 어떤 챔피언과 아이템을 써야 하는지 통찰력까지 갖추고 있다. 지금까지 살면서 주기율표를 전부 외운 사람은 한 명도 못봤지만, 롤 아이템을 전부 아는 사람은 숱하게 봤다. 놀이의 힘은 이렇게나 강력하다.
성공하고 싶다면, 특히 콘텐츠 분야에서 성공하고 싶다면 소비는 피할 수 없는 숙명이다. 피할 수 없다면? 그렇다. 즐겨라. 그래야 효과도 커진다.
4) 많은 시도
소비에서 중요하게 생각해 볼 점 중 하나는 지금 하는 소비를 계속 이어나갈지 여부이다. 소비의 방향이 잘못될 수도 있다. 이때 멘토가 있으면 도움이 되겠지만, 복잡계 같은 영역에서는 그런 도움도 받기 힘들다. 정말 말 그대로 뭐가 정답인지 알 수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냥 소비만 할 게 아니라 이를 바탕으로 계속 창작을 시도해야 한다. 그래서 결과를 통해 지속적으로 피드백을 받아야 한다. 학습과 성장에서 가장 중요한 것 중 하나가 피드백이다. 피드백을 얻기 위해서라도 소비는 많은 시도와 병행되어야 한다.
조직은 어떻게 소비를 장려할 것인가?
1) 소비를 업무 시간에 배정하라
회사 입장에서는 업무에 도움이 되는 소비를 했으면 좋겠지만, 직원들이 따라줄 리가 만무하다. (물론 승진하고픈 야망이 있으면 그러겠지만, 요즘 세대는 그런 거 없다더라…) 게다가 아웃풋까지 하라고 시키면 더 하기 싫어질 수밖에 없다.
그러니 어쩔 수 없다. 소비를 업무 시간에 포함시켜라. 금요일 오후 3시부터는 퇴근 전까지 소비만 한다던가 하는 식으로 계획하면 좋다. (어차피 불금 오후 3시 이후에 제정신으로 일하는 사람도 없을 텐데 소비라도 하는게…) 단, 소비 분야를 명확히 정해주고, 그 결과를 보고서로 제출하게 하라. 물론 보고서를 어떻게 쓰느냐도 중요한다. 역시 리뷰 형식이 되는 게 좋고, 이 리뷰를 고과에 반영하지 않는 센스를 발휘해야 한다.
2) 소비한 내용을 가지고 토론하라
같은 분야를 소비해도 사람이 다르면 보이는 패턴이 다르고 얻어지는 통찰이 달라진다. 그러니 혼자 소비하지 말고, 여럿이 소비하고 이를 토론하는 시간을 가져라. 특히 새로운 프로젝트를 시작한다면 이런 과정을 필수로 거쳐야 한다. 무작정 아이디어 가져오라고 닥달하지 말고, 아이디어를 만들 시간과 연료를 공급하라. 아무것도 모르면 통찰력을 얻을 수 없다는 걸 명심하라.
3) 평소에 소비하라
새로운 프로젝트를 위해 소비를 시작한다고 급하게 소비하면 나오는 아웃풋이 그나물에 그밥일 확률이 높다. 덕후가 되지 않으면 디테일한 핵심이 보이지 않는다. 세상에 일주일만에 덕후가 되는 사람은 없다. 하지만 3주 정도면 감이 잡히고, 3개월이면 가성비를 읊는 수준까지 가능할 것이다. 그러니 일찍 소비를 시작하라. 나아가 평소에 소비를 습관화하라. 직원들을 덕후로 만들어라. (안 할 것 같다고? 업무 시간이 아니니까 그렇지! 돈 주면 출근도 하는데, 그깟 덕후하라는 데 안 할 사람이 어딨겠는가?)
참고 : 책 <생각이 돈이 되는 순간>
이미지 출처 : 영화 <아이언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