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화에 대해 설명할 때 쓰이는 대표적인 관용어구가 ‘가장 한국적인 것이 가장 세계적인 것이다’이다 . 최근에는 봉준호 감독의 영화 ‘기생충’이나 빌보드 ‘HOT 100’ 차트 1위를 차지한 방탄소년단(BTS)을 가리켜 쓰이기도 한다. 다시 말해 다양한 교류 활동으로 다양한 문화가 서로 섞이고 맞물리는 게 당연해지는 세상이 왔다. 여기서 주목해야 할 점은 ‘한국적인 것’은 꼭 처음부터 한국인이 만들고, 한국땅에서 생산된 제품이어야 하는가 이다. 온라인 커뮤니티들 사이에서 돌고 있는 분필 회사에 관한 이야기다.
‘하고로모’ 라는 이름의 분필이 있다. 이 분필은 상표명에도 알다시피 1932년부터 일본 나고야에서 만들어져 3대째 가업으로 이어져 왔다. 이 분필은 형광색까지 소화하는 다양한 색상과 잘 부러지지 않고 부드럽지만 선명하게 써져 세계적인 수학교수들로부터 호평을 받고 있다. 하지만 3대 사장이었던 타카야스 와타나베 사장의 건강 악화로 2015년 생산이 중단될 위기에 처했다.
이때 무역회사 세종몰의 신형석 대표가 이 회사를 인수한다. 과거 잘나가던 학원의 수학 강사였던 신 대표는 강사 시절부터 이 분필의 고품질을 알고 있었다. 사실 일본 현지에서도 와타나베 사장으로부터 이 분필의 제조법을 사겠다는 업체가 많았다. 하지만 와타나베 사장은 ‘하고로모’라는 역사 가득한 브랜드명을 지키고 싶어 수차례 거절해왔다.
현지 업체도 인수하지 못한 이 분필회사를 한국인이 어떻게 인수했던 것일까. 언론 인터뷰에 따르면 신 대표는 오래 전부터 이 분필을 도매로 수입해 써오고 있었다. 그는 ‘좋은 분필이 없어져선 안된다’는 이유로 와타나베 사장을 설득했다. 상표를 유지시켜 주겠다는 한국인의 진심에 와타나베 사장은 사업권 인계를 결정했다. 이후 이 분필의 매출은 2016년부터 3년간 매년 두 배 가까이 증가했다. 일본 언론은 좋은 기술력을 한국에 빼앗겨 안타깝다는 내용의 다큐멘터리를 제작할 정도로 아쉬워했다고 한다.
다시 말해 오늘날 이 분필의 제조사는 한국이며, 따라서 상표에 붙는 제조국 표시도 ‘메이드 인 코리아(Made in Korea)’다. 오로지 분필 하나만을 보고 살아왔던 장인에게 국경 따위는 없었던 셈이다. 그리고 정치에서는 서로 으르렁대는 한국과 일본이지만 비즈니스 세계에서는 전혀 다를 수도 있다는 걸 보여준 사례다. 그리고 세계적인 한국 상품의 시작이 꼭 한국에서 태어나란 법은 없다는 것을 증명했다.
이를 개인의 차원으로 옮겨오자면, 우리는 각자가 가진 재능과 가능성에 대해 좀더 열린 자세로 접근해야 할 필요가 있다는 거다. 만약 신 대표가 스스로 무역회사를 차리지 않고 강사라는 직업에만 만족하고 분필을 수입하는 것에만 머물러 있었다면, 세계 최고 품질의 분필은 한국산 제품이 되지 못했을 것이다. 어쩌면 하고로모 분필은 역사 속으로 사라졌을 지도 모른다. 우리 각자 갖고 있는 재능을, 단지 현재의 삶을 유지하기 위한 직업에 한정시키고 있는 건 아닌지 돌아보자. 미처 살펴보지 못했던 나의 또다른 재능을 깨워보자.
참고
1. <세계 최고의 명품 일본산 분필 .jpg>, 웃긴대학 등
2. <[인터뷰] 일본 명품 분필 ‘하고로모’ 인수, 한국서 생산한 학원강사 스토리>,
비즈한국 : https://bit.ly/3jMzU1f
3. Hagoromo Chalk documentary, 유튜브 Ying Hong Tha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