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친구와) 잘 못 지낸 우리도 잘 한 건 없지만 걔도 잘한 건 없어.’
내가 속한 조직의 모든 사람들과 원만하게 잘 지낼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대개의 경우 구성원 모두가 친하기는 어려운 일이다. 사람은 저마다 성격과 취향이 다르며, 여기서 나와 맞고 안 맞고의 차이가 생긴다. 크게 언성을 높여 싸우지 않는 경우를 빼고 친밀함 정도의 차이만 있을 뿐 인사 같은 기본적인 소통은 다 하고 지내는 것이 보통이다. 그런데 다음과 같은 경우엔 참 답답하다.
온라인 커뮤니티 웃긴대학에 한 게시물이 올라왔는데 다음과 같다.
투명인간, 3번에서 언급한대로다. 물리적 언어적인 폭력은 없다. 없는 사람 취급하는 이유는 친하지 않고, 이런 취급을 당하는 사람이 대인관계에 문제가 있기 때문이라고 생각하기 쉽다. 함께 어울리려고 다가갔는데 나와 맞지 않았다든지 혹은 원래 ‘은둔자’적인 기질이 있어서 그러는 건지 말이다. 말 그대로 당사자가 일부러 주변 관계를 최소화하려고 하는지는 알 수 없다. 하지만 고대 철학자 아리스토텔레스의 격언대로 인간은 ‘사회적’ 동물이다. 다시 말해 홀로 살아갈 수 없는 존재다. 따라서 외로움은 위 게시물에 해당하는 당사자에게 부정적인 영향을 줄 가능성이 크다.
책 <공간의 재발견>에 따르면 외로움을 비유적으로 표현할 때 ‘차디찬 길바닥에 내버려진 것 같은 느낌’처럼 추위와 연결하는 경우를 흔히 본다. 하지만 흥미롭게도 이것은 ‘비유’가 아니라 ‘실체’다. 한 연구 결과도 외로운 경험을 회상한 사람들은 그렇지 않은 사람보다 방 안의 온도를 유의미하게 낮게 예상했다고 한다. 외로움은 실제로 추위를 느끼게 하며, 움츠러들면 당연히 학업이나 업무 수행 능력에서도 제 실력을 발휘하지 못한다. 책에서는 외로움을 달래줄 진정한 우정의 조건으로 네가지를 이야기 한다.
그렇다면 이 글에 제목대로 교사가 개입하기 애매한 상황처럼 어른의 역할은 어떠해야할까? 어느 한쪽을 보고 왜 저 친구랑 같이 놀지 않느냐고 또는 왜 저 친구들과 어울리지 않느냐고 다그치는 건 되레 서로에게 더 좋지 않는 감정만 남긴다. 먼저 어울리는 거와 관계없이 하루에 오랜 시간 혼자 다니는 당사자의 있는 그대로 모습을 봐주고 관심을 기울여주는 것이 먼저라고 생각한다. 중요한 건 혼자 지내는 당사자의 태도와 성격이 극히 혐오감을 주는 게 아니라면, 의도적으로 소외시키는 것은 그 어떤 이유에서라도 정당화되기는 어렵다.
참고
1. <교사가 개입하기 애매한 상황.jpg>, 웃긴대학
2. <공간의 재발견>, 론 프리드먼 저, 토네이도
썸네일 이미지 출처: 드라마 ‘학교 2013’ KB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