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민국 사람이라면 의자왕이 죽자 그의 3천 궁녀가 낙화암에 몸을 던졌다는 설화를 한 번쯤 들어봤을 것이다. 이 설화로 인해 의자왕은 여색을 밝히고 방탕한 생활을 한 폭군으로 그려졌다. 하지만 정말 그랬을까?
1) 의자왕의 인성은 괜찮은 편
<삼국사기>에 따르면 효성이 지극하고 형제간에 우애가 깊으며 용맹하고 유능했던 왕이었다고 한다. 특히 효성이 지극해서 동방의 증자로 불렸다고 한다. (증자는 공자의 제자 중 하나로 효자의 아이콘이다)
2) 무능한 왕도 아니었다
즉위 이후에는 직접 군사를 이끌어 신라의 40여 성을 함락시키기도 했다. 특히 옛 가야의 거점이던 대야성을 함락하는 쾌거를 올리기까지 했다. 이처럼 재위 초 의자왕은 내부적으로는 온화한 정치를 펼치고 외부적으로는 숙적이었던 신라를 정벌하며 영토를 확장했다. 백제의 부흥기를 이끈 유능한 왕이었던 것.
3) 상식적으로 3천 궁녀가 있을 수 없다
백제 말기 수도 사비성의 인구가 대략 5만 명 내외. 이중 절반을 여성이라 치고, 어린이와 노인을 제외하면 궁녀로 일할 수 있는 적당한 나이의 건강한 여성은 15,000명 정도 된다. 이 중 20%가 궁녀여야 3천 궁녀가 가능한데 이러면 인구가 유지될 수도 없고, 이들을 먹여 살릴 수도 없다. 실제로 백제 궁터만 봐도 3천 명을 수용할 만큼 넓지도 않다. 조선 시대에 궁녀가 가장 많았던 시절에도 1천 명을 겨우 넘긴 수준이었는데, 백제 시절에 3천 궁녀가 현실적으로 존재할 수가 없다.
4) 낙화암은 너무 좁아…
낙화암에 3천 명이 서 있을 공간도 없다. 아마 여기서 몸을 던지려면 줄서서 하루 종일 뛰어내려야 했을 것이다. (무슨 다이빙 핫플레이스도 아니고…)
5) 결정적으로 3천 궁녀에 관한 기록이 없다
정사인 <삼국사기>, 야사인 <삼국유사> 그 어디에도 3천 궁녀에 관한 이야기가 없다. 오히려 <삼국사기>에는 의자왕이 최후까지 항전했다고 나온다. 최초로 3천 궁녀 이야기가 문서에 등장한 것은 조선 시대 시집인 <속동문선>. 이에 관하여 ‘3천’이 정말 숫자 3천을 가리키는 게 아니라 많음을 뜻하는 문학적인 표현이라는 말도 있다. (3천 궁녀가 죽었다 = 많은 궁녀가 죽었다)
결론) 3천 궁녀는 한반도에서 가장 오래된 ‘가짜뉴스’
의자왕이 비록 말년에 실책을 저질렀고, 그로 인해 나당연합군에게 패배하긴 했지만, 그가 주색잡기에 빠진 무능한 왕이라고 보기는 어렵다. 즉위 초에는 백제 부흥을 일으킨 왕이기도 했고, 평가도 매우 좋은 왕이었던 것. 그런 의자왕이 3천 궁녀라는 설화 하나로 전혀 다른 이미지를 갖게 되었다. 역대 왕 중에서 가장 억울할 만하다.
이런 오해에 쐐기를 박은 것은 교육 정책이었다. 교과서에 3천 궁녀 이야기가 실려서 전 국민의 머릿속에 ‘의자왕은 여색을 밝힌 왕’이라는 이미지가 박혀버린 것. (나도 그중의 한 사람이다) 교육의 힘이 얼마나 큰지 알 수 있는 사례라고 할 수 있다.
참고 : 한반도 역사상 가장 억울한 왕 .jpg, 웃긴대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