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재벌이 아들에게 물려주었다는 유언장.jpg

 

위 사진은 1971년 3월 11일 75세로 영면한 유일한 박사의 유언장이다. 유언장에는 다섯 가지가 적혀있었다.

 

첫째, 손녀 유일링에게는 대학 졸업 시까지 학자금 1만 달러를 준다.

 

둘째, 딸 유재라에게는 유한공고 안에 있는 묘소와 주변 땅 5천 평을 물려준다. 그 땅은 결코 울타리를 치지 말고 학생들이 마음대로 드나들게 하며 그 어린 학생들이 티 없이 맑은 정신에 깃든 젊은 의지를 지하에서나마 더불어 느끼게 해달라.

 

셋째, 유일한 자신의 소유 주식 14만 941주는 전부 기부한다.

 

넷째, 아내는 딸 재라가 노후를 잘 돌봐주기 바란다.

 

다섯째, 아들 유일선은 대학까지 졸업시켰으니 앞으로는 자립해서 살아가거라.

 

 

유한양행의 창업자 유일한 박사는 대한민국에서 존경할만한 경영가로 자신 있게 뽑을 수 있는 삶 자체가 우리에게 울림을 주는 분이다. 유일한 박사를 수식하는 단어는 세 개로 나눠 볼 수 있다.

 

1) 아메리칸 드림의 주인공

2) 독립운동가

3) 노블레스 오블리주

 

유일한 박사는 독실한 기독교 신자이자 상인 그리고 독립운동을 도왔던 아버지 유기연과 김기복 씨의 9남매 가운데 장남으로 태어났다. 남다른 교육열을 가지고 있던 아버지 유기연은 자신의 장남을 어린 나이에 미국으로 유학 보내게 된다. 유일한 박사의 나이 당시 9살이었다.

 

미국 네브레스카 주의 독신자 자매인 태프트 자매에게 입양된 유일한은 자매의 성실하고 검소한 기독교의 노동윤리를 몸소 체험하게 된다. 자신의 타고난 기질, 아버지의 모습, 그리고 태프트 자매의 삶을 바라보면서 유일한은 자신의 올바른 기업관을 확립하게 된다.

 

유일한 박사의 본명은 유일한이 아니라 원래 유일형이다. 박사가 중학교 시절 신문 배달 아르바이트를 하는 도중 함께 일하던 직원이 일형의 발음이 어려워 제멋대로 일한으로 불렀다고 한다. 처음에는 웃어넘겼지만, 타국에 있으면서 절대 한국을 잊지 말자는 의미로 그는 스스로 ‘유일한’으로 개명을 하게 된다. 스스로 개명을 한 것도 대단한 행동이었지만 아버지 유기연은 유일한보다 한술 더 떴다. 개명의 뜻이 깊다고 생각한 그는 장남뿐만 아니라 동생들의 돌림자도 한으로 바꿔 버렸다.

 

유일한 박사는 제너럴 일렉트릭사에 입사하지만 3년 만에 회사를 나와 숙주나물 통조림을 제조하는 라초이 식품회사를 창업하게 된다. 당시 중국 음식에 필수 재료였던 숙주나물은 유통이 발달하지 않아 금방 썩어 말라버리곤 했다. 유일한 박사는 연구 끝에 장기보관할 수 있는 통조림을 개발했고 그의 숙주나물 통조림은 큰 성공을 거두게 된다. 그래서 서른 살이 되기 전에 그는 아메리칸 드림을 일구게 된다.

 

하지만 유일한의 아버지는 민족의 미래를 위해 미국으로 유학 보냈으나 식품회사 경영을 하는 아들에게 실망해 ‘큰 공부를 했으면 큰일을 하라’고 꾸짖었다고 한다. 1924년 그의 나이 29세, 거래선 확보를 위해 중국을 갔다 오면서 20년 만에 한국을 밟게 된다. 헐벗고 굶주린 동포들이 눈에 선하게 들어왔고 이제는 고국을 위해 일을 해야겠다는 결심을 하게 된다. 그리고 1926년 그의 나이 31세 때 유한양행을 설립하게 된다. 유한양행의 로고인 버들표는 독립신문을 만들고 독립협회를 조직했던 서재필이 ‘뜨거운 여름날 사람들이 햇빛을 피해 마음 놓고 쉴 수 있는 시원한 그늘이 돼라’는 뜻에서 선물했다고 한다.

 

 

유한양행은 처음에는 국내에 필요한 약을 미국에서 수입해서 팔았지만, 1933년에는 진통소염제 안티푸라민 등을 개발하여 판매하게 되면서 성장하게 된다. 그의 깨끗한 윤리 경영은 당시에는 보기 드물었던 신문광고에서 볼 수 있다. 당시의 제약회사들은 자신의 약을 만병통치약인 듯 선전하며 소비자들을 현혹하기 바빴지만, 유한양행은 신문 광고를 통해 제품의 용도를 밝히는 것은 물론 약을 개발하고 제조한 인물들을 밝혀 신뢰도를 높였다.

 

 

이런 유일한 박사의 파격적인 비즈니스 행보는 당시 사회에 충격을 주기에 충분했다. 그는 거기에서 끝나지 않았다. 유한양행은 1936년 6월 20일 1주당 50원씩 총 1만 주의 주식을 발행해 자본금 50만 원 주식회사로 변모하였는데 당시 유일한 박사를 포함한 종업원 77명 가운데 24명이 주주로 등재되었다. 국내 최초로 종업원 지주제를 실천한 것으로 직원들과 기업의 이익을 함께 나누고자 하는 실천적 모습을 선도적으로 보여주었다. 유일한 박사는 정경유착이 일상화되던 시대에 살았음에도 불구하고 정치가들에게 전혀 기대지 않았다.

 

 

정치자금을 제공하지 않아 정치가들에게 미운털이 박혀 이승만과 박정희 아래서 수 차례 세무사찰을 받았으나 드러난 탈세 사실이 전무했다고 한다. 오히려 성실한 세무 납부가 드러나 표창장까지 받게 된다. 유일한 박사는 마지막까지 우리에게 귀감이 되었다. 그가 대표 자리를 떠날 때는 자신의 자식에 회사를 물려주지 않고 전문 경영인에게 경영권을 넘겼다.

 

사실상 국내 최초의 전문경영인 체제를 구축한 것이다. 그리고 무엇보다 그는 세상을 떠나면서 손녀의 등록금을 제외한 전 재산을 전액 기부했다. 당시 그가 기부한 재산은 71년 당시 금액으로 36억 2000만 원이다. 그가 평생 기부한 금액은 50억 원이 넘는 것으로 알려졌는데 당시에 신입사원 월급이 2만 원이엇다고 하니 현재로 따지면 5000억 원이 넘는 금액이다.

 

더욱 감동이 되는 것은 손녀인 유일링 씨는 자신에게 남겨진 등록금 중 반만 쓰고 나머지 반은 사회에 환원했다고 한다. 그리고 딸 유재라 씨는 20년 후에 200억 원에 이르는 모든 재산을 재단에 기부했다. 노블레스 오블리주의 표본적인 가족이라 할 수 있지 않을까?

 

 

어느 누구의 말대로 유일한 박사가 남긴 것은 돈이 아니라 시대의 양심이었다.

 

 

참고 : 돈 몇 푼이 아니라 시대의 양심을 선택하다, 체인지그라운드 유튜브 (링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