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시대 정조의 수라상 클라스

우리나라 사람들이 사랑하고 존경하는 대표적 조선시대 임금은 세종과 정조다. 세종대왕은 ‘한글 창제’ 하나만으로도 더 이상 설명이 필요 없을 정도다. 그렇다면 정조 대왕은? 아마도 당쟁의 희생양이 된 아버지의 비극적인 죽음을 눈앞에서 목격한 큰 상처를 극복하고 할아버지인 영조의 뜻을 이어 ‘탕평책’을 펼친 위대함이 돋보이기 때문일 것이다. 그리고 그의 안타까운 죽음 이후, 조선왕조가 망국의 길로 치달았다는 점도 그가 조선의 위대한 왕이었음을 도드라지게 만든다.

 

대통령도 본받고 싶어하는 정조 대왕의 리더십. 뛰어난 국정 운영 못지않게 주목 받을 것이 있다. 바로 어머니 혜경궁 홍씨에 대한 효심이 가득한 그의 수라상이다.

 

 

흔히 왕과 왕비의 평상시 밥상을 ‘수라상’이라고 말한다. ‘수라’는 고려 말과 조선시대 왕에게 올린 밥을 경어로 이른 궁중용어다. 이 말의 어원은 몽골어로 음식이란 뜻을 가진 ‘슐라’에서 나왔다. 수라상에 오르는 반찬 가짓수는 기본이 12가지다. 하지만 사진에 등장한 정조의 수라상에 올라온 반찬 가짓수는 7가지다. 왜일까? 사진 속 7첩 반상이 차려진 1795년 윤2월 당시, 정조는 어머니의 회갑을 맞아 어머니를 모시고 수원 화성 행궁으로 행차를 나간다. 수원 화성은 정조가 거중기를 이용해 만들었으며, 양주에 있던 아버지 사도세자의 능을 모신 곳으로 유명하다. 혜경궁 홍씨의 회갑연을 기록한 ‘원행을묘정리의궤(1795)’에 따르면, 서울~수원 8일의 여정 동안 어머니의 아침상에는 10가지가 넘는 반찬이 그의 아침상에는 7가지 반찬이 올려져 있었다고 기록돼 있다. 어머니에 대한 지극한 효성의 표시로 본인의 상을 어머니의 상보다 검소하게 차리라고 한 것이다. 당시 백성들과 마찬가지로 부모를 생각하는 마음 앞에서 권위도 내려놓을 줄 아는 임금이었다.

 

무엇보다 놀라운 건, 서울에서 수원 화성행궁까지 간 일정과 여기에 들어간 모든 음식들(상궁이나 평민이 먹었던 음식까지), 음식에 들어간 재료와 분량, 비용 등을 모두 꼼꼼히 기록했다는 거다. 덕분에 21세기를 사는 우리들도 200년 전의 생활상을 보다 더 생생하게 알 수 있다. 정조는 수원에서 어머니의 회갑연을 마치고 다음 날 노인 관료와 화성 거주민들을 모아 다시 잔치를 열었다고 한다. 여기에는 노인들이 먹기 편한 음식들이 주로 올라왔다고 하는데, 그는 200년 전부터 ‘고령사회’를 예상한 것일까. 아무쪼록 그의 밥상에서 시간을 뛰어넘는 리더십과 소탈함을 다시 한번 더 실감한다.

 

참고
1. <조선시대 정조의 7첩 수라상.jpg>, 더쿠
2. <조선궁중음식 2부 혜경궁 홍씨의 수라에 담긴 정조의 효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