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년 전 외국어 능력자의 위엄

 

문순득(1777~1847)은 조선 후기 전라도의 작은 섬 우이도에 살며 홍어를 거래했던 평범한 어물 장수였다. 그런데 이 평범한 백성이 역사에 이름을 남기게 된다. 그 배경에는 실화라고 믿기 힘든 파란만장한 이야기가 담겨 있다.

 

 

1802년 12월 문순득은 홍어를 사러 흑산도에 갔다가 우이도로 돌아오는 길에 큰 풍랑을 만난다. 바다에서 열흘 넘게 표류하던 문순득 일행은 1802년 1월 유구국(류큐 왕국), 지금의 오키나와에 표착한다. 다행히 현지인들은 문순득 일행을 잘 보살펴주었다고 한다.

 

문순득 일행은 8개월 동안 유구국에 머물며 유구어를 배우고, 현지인들과의 대화를 통해 조선으로 돌아가는 방법을 알아낸다. 바로 중국으로 가는 조공선에 탑승해 중국을 거쳐 조선으로 돌아가는 것. 청나라 푸저우에 도착한 후 육로로 베이징까지 가면 정기적으로 오는 조선 사신단을 통해 고향으로 돌아갈 수 있었다. 그리하여 1802년 10월, 중국으로 가는 조공선에 몸을 실었으나…

 

 

중국으로 가는 길에 또 풍랑을 만났다. 이번에는 유구국보다 더 남쪽으로 떠내려가 여송(지금의 필리핀 루손 섬)의 비간 마을에 당도한다. 이 과정에서 조선인 일행은 뿔뿔이 흩어졌다. 유구국과 다르게 여송에서는 약간의 지원만 받을 수 있었고, 문순득은 9개월을 지내면서 여송어를 익히고 끈을 꼬아 팔며 생계를 꾸려나갔다.

 

동시에 주변을 돌아다니며 당시의 풍속을 보고 관광도 다녔다고 한다. 당시 필리핀은 스페인의 식민지였고, 비간 마을도 스페인 사람들이 개척한 마을이었다. 문순득은 이때 마을 중앙에 있는 성당과 종탑을 보고 신선한 충격을 받았다고 한다.

 

 

그 후 1803년 8월 여송에서 마카오 상선을 얻어타고, 이번에는 풍랑을 만나지 않고 무사히 마카오에 도착한다. 여기서 육로를 통해 베이징으로 간 뒤 사신들과 함께 1804년 12월 한양에 당도한다. 그리고 마침내 집을 떠난 지 3년 2개월 만인 1805년 1월에 고향인 우이도로 돌아온다.

 

 

고향에 돌아온 문순득은 다시 홍어를 거래하기 위해 흑산도에 들렀는데, 이때 흑산도에 유배 온 정약전을 만나게 된다. (실학자 정약용의 형) 정약전은 문순득의 표류기를 듣고는 바로 대박 콘텐츠임을 감지하고 이를 책으로 저술하는데, 이 책이 바로 ‘표해시말’이다. (책을 펴고 앉아있는 분은 문순득의 5대손 문채옥 씨)

 

 

1979년 섬 민속 연구를 위해 우이도를 찾은 최덕원 순천대 교수가 문채옥 씨 집에 있던 고서를 조사하다가 발견해서 세상에 알려지게 되었다. 당시 류큐 왕국, 필리핀, 중국의 여러 모습과 유구어, 여송어 단어가 기록되어 있어 학술적 가치가 매우 높다고 한다. 표해시말 집필을 계기로 문순득과 정약전은 가족 같은 사이가 되었다고 한다.

 

 

문순득의 활약은 여기서 끝이 아니었다. 1801년 5명의 외국인이 제주도에 표착했는데, 조정에서는 이들과 말이 통하지 않아 어느 나라에서 온 사람인지 알 길이 없었다. (중국에도 데려갔으나, 중국에서조차 모른다 하여 다시 조선으로 돌아왔다) 그래서 신원불명인 채로 9년간(…) 제주도에 머물고 있었는데… 문순득이 이들과 말을 할 수 있었다. 그들은 여송 사람이었고, 표류 중에 배웠던 여송어로 대화를 할 수 있었던 것. 여송 사람들은 드디어 집에 갈 수 있겠다고 대성통곡을 했다고 한다.

 

문순득은 한국 역사상 최초의 필리핀어 통역사로 활약했고, 이에 조정에서는 문순득의 공을 치하하고 가선대부 종2품의 벼슬을 하사했다고 한다. 명예직이긴 하지만 상당한 고위직이라고 한다. 파란만장한 삶과 외국어 능력으로 인생 역전한 셈이다.

 

 

아무리 표류해서 이국땅에 머물렀다고 해도, 문순득의 외국어 습득 능력은 이례적으로 빠르다. 당장 제주도에서 9년이나 머물렀던 여송 사람과 비교해도 3년 만에 유구어와 여송어를 배운 것은 대단하다는 말로도 부족해 보인다. 문순득은 타고난 외국어 능력자였을까? 물론 어느 정도 소질도 있었겠지만, 나는 그의 뛰어난 적응력과 강인한 생활력이 도움이 되었다고 생각한다. 낯선 나라에 표류했다고 좌절하지 않고, 그 상황에서 최선을 다해 살아남으려고 노력한 결과, 외국어 능력자가 되지 않았을까? 그의 포기하지 않는 의지와 끈기는 오늘날에도 본받을 가치가 있다고 생각한다.

 

참고 : 조선시대 두번이나 풍랑 만나서 필리핀까지 표류했다가 돌아온 뱃사람, 에펨코리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