훌륭한 리더의 성공비결 “의외로 악독함…”

우리나라 역사에서 가장 훌륭한 위인은 누가 뭐래도 세종대왕이라고 생각한다. 그가 남긴 업적을 생각하면 훌륭하다는 말로도 부족할 정도다. 일단 한글을 만드신 것만으로도 역대급 위업을 달성한 데다 농업, 교육, 음악, 수학, 과학, 국방 등 거의 모든 분야에 엄청난 영향력을 행사했다. 과연 한 사람이 이만큼의 업적을 달성하는 게 가능한가 의구심이 들 정도다. 세종대왕님은 몸이 12개라도 되었던 걸까? 그런데 이런 업적을 달성할 수 있었던 비결이 하나 있기는 하다. 최근 들어 세종대왕님께 별명이 하나 생겼는데, 바로 ‘노인 사냥꾼’이다.

 

 

세종 6년 1월 4일, 병조 판서 조말생이 병으로 사직하려고 상서하였으나(대략 늙고 풍병을 앓아 힘들다는 내용), 윤허하지 아니하였다.

 

세종 6년 4월 25일, 병조 판서 조말생이 사직을 청하는 전문을 올렸으나(대략 풍질이 심해져 힘들다는 얘기), 윤허하지 아니하였다.

 

세종 7년 10월 5일, 병조 판서 조말생이 사직을 청하였으나(풍병에 낙상 2번이 겹쳐 힘들다는 내용), 임금이 윤허하지 아니하고 “다행히 지금 국가에 일이 없어 한가하니, 만약 병이 낫지 아니하거든 편하게 조리하고 간간이 일을 보라.”라고 하였다. (…)

 

세종 15년 11월 17일 함길도 관찰사 조말생이 병으로 사직하기를 빌었으나 허락하지 않다.

 

세종 19년 9월 4일, 지중추원사 조말생이 사직을 청했으나 윤허하지 아니하였다

 

세종 22년 8월 10일 판중추원사 조말생이 전문을 올려 사직하기를 원했으나 윤허하지 아니하였다.

 

세종 23년 10월 27일, 예문관 대제학 조말생이 늙고 병이 있다는 이유로 사직을 청하니 임금이 윤허하지 아니하고 이르기를 “예문관은 한가한 벼슬이므로 경이 비록 병이 있을지라도 조섭할 수 있으니 혹시라도 사직할 생각은 말라.” 하였다. (어딜 도망가려고!)

 

세종 28년 5월 11일 영중추원사 조말생이 사직코자 상서했으나(나이가 77살에 풍질이 심해 힘들다는 내용), 윤허하지 아니하였다.

 

세종 28년 11월 28일 영중추원사 조말생이 벼슬을 그만두겠다고 상서하였으나 윤허하지 아니하였다. 그리고 조말생은 5개월 뒤에 사망하였다. (…)

 

>>> 50대부터 풍병을 앓아온 사람을 77살까지 부려 먹다가 쉬지도 못하게 하고 사망하게 만듬…

 

 

세종 9년 6월 17일 한재의 책임을 지고 좌의정 황희가 사직을 청하나, 임금이 말하기를 “조정에 있는 신하로서 누가 능히 제 직분을 다했노라고 말할 것인가. 이와 같이 나간다면 조정이 아주 비게 되리로다.” 하고 집현전 관원을 시켜 이 뜻을 가지고 그의 집에 가서 설유하게 하였다.

 

세종 14년 4월 20일, 황희가 고령을 이유로 사직하였으나(대략 나이가 70이라 귀도 멀고, 눈도 어둡고, 허리도 아프고, 걷기도 힘들다고 함), 윤허하지 아니하고 비답하기를 “어려운 것을 극복하는 임금은 보필하는 재상의 어짐에 힘입는 것이니 (생략) 어찌 그 물러가고 나아가는 일이 용이하게 할 수 있겠는가 (생략)” (응~ 안 놔줄 거야~)

 

세종 14년 12월 7일, 영의정 황희가 사직하니, 윤허하지 아니하였다.

 

세종 17년 3월 29일 영의정부사 황희가 전을 올려 노쇠함으로 사직하기를 청하니 이를 허락치 않다.

 

세종 20년 4월 14일 황희가 전을 올려 사직하였으나 임금이 윤허하지 아니하였다.

 

세종 21년 6월 11일 영의정 황희가 사직할 것을 청하였으나 집에 누워서 대사를 처결하게 하였다. (사직 대신 재택근무 제안)

 

세종 31년 5월 27일 한재로 인해 상서하기를 “신의 나이가 90에 가까운데 (…) 공이 없이 녹을 먹으오니, 청하옵건대 신의 직책을 파하여 하늘의 꾸지람에 응답하소서.”하니 윤허하지 아니하였다.

 

>>> 늙어서 걷지도 못하자 집에 누워서 일을 보라며 끝까지 놔주지 않음. 심지어 나이가 90이 다 될 때까지 부려먹음…

 

조말생과 황희는 세종이 가장 심하게 부려먹은 신하로 유명하다. 이 외에도 나이 든 신하들이 수없이 사직을 요청하였으나, 세종은 끝까지 들어주지 않고 부려먹을 수 있을 때까지 부려 먹었다. 일반 회사였으면 더러워서 때려치고 나왔을 법도 한데, 나라를 버릴 수는 없는 노릇이니, 신하들은 울며 겨자 먹기로 녹봉을 받을 수밖에 없었다. 백성에게는 최고의 왕이었으나, 신하들에게는 악덕 상사였던 셈이다.

 

 

이와 비슷한 사람이 중국 황제 중에도 있었는데, 바로 명을 건국한 주원장이다. 그는 찢어지게 가난한 소작농에서 황제의 자리까지 오른 역사에서 유래를 찾아보기 힘든 엄청난 인물이었다. 비슷하게 평민에서 황제가 된 인물로 한 고조 유방이나 삼국지의 유비가 있지만, 그들도 말단 관직이 있거나 나름 지역 유지와 인맥이 있는 등 어느 정도 기반이 있었다. 하지만 주원장은 진짜 아무것도 없는 밑바닥에서 시작한 인물이었다. 가족이 모두 굶어 죽고, 배가 고파 절에 들어가 죽을 얻어 먹으며 젊은 시절을 보내다 군벌에 들어가 공을 세워 끝내 황제에 올랐다고 하니 정말 대단한 인물이다. 그 결과… 명나라 신하들의 월급은 중국 역사상 가장 짰다고 한다.

 

 

 

 

이처럼 신하들을 쥐어짠 결과 백성들 사이에서는 명군으로 칭송받기에 이른다. 단순히 월급만 쥐어짠 게 아니라 업무 면에서도 신하들을 쥐어짰는데, 그럴 수 있었던 이유는 주원장 본인이 엄청난 업무량을 보여주었기 때문이다. 기록에 따르면 8일 동안 3,391건의 문서를 처리했다고 하는데, 대략 하루에 400건의 일을 처리한 셈이다. 이 정도면 먹으면서도 일을 했다고 봐야할 것이다. 이와 관련한 일화가 하나 있다. 한 신하가 문서를 올렸는데 글자는 1만 5천 자나 되면서 아부하는 내용이 대부분에 쓸모 있는 내용은 하나도 없었다고 한다. 주원장은 노발대발하며 그를 숙청했다. 하루에 문서를 400건이나 읽어야 하는데 내용도 없는 문서에 열 받는 게 당연한 노릇이랄까?

 

 

세종대왕과 주원장. 두 사람은 어째서 신하들을 쥐어짠 걸까? 그들은 알고 있었다. 그게 백성을 위하는 길이라는 사실을 말이다. 관리가 편하면 백성이 고달픈 법이다. 반대로 관리가 힘들면 백성이 편해진다. 일을 제대로 하려면 심신이 고달픈 법이다. 스트레스도 심하고, 육체적 정신적 피로가 쌓이는 게 당연하다. 만약 업무를 하면서 아무런 고통도 없다면, 그것은 업무를 제대로 보지 않았다는 말과 같다. 물론 맡은 일은 잘 처리할 순 있지만, 발전이나 혁신은 절대 일어날 수 없을 것이다. 제대로 한다는 것은 그만큼 힘든 일이다.

 

이는 오늘날에도 유효하다. 잘 나가는 회사는 사장이 제일 힘들다. 막중한 선택을 해야 하고, 이를 위해 각종 정보와 분석을 빠삭하게 알아야 한다. 그러려면 자는 시간까지 아껴가며 일해야 한다. 실제로 글로벌 기업 CEO들의 평균 근로시간은 15시간을 넘는다고 한다. 그런데 사장이 맨날 골프나 치러 다니고, 항상 편하고, 흥청망청 산다면? 그런 회사가 잘 될 리가 없다. 만약 잘 되고 있다면 회사를 굴러가게 하는 핵심 인물은 따로 있다고 봐야 한다. 그 사람이 회사를 떠나면 금세 무너지고 말 것이다.

 

훌륭한 리더는 고생을 사서 하는 사람이다. 세종대왕과 주원장은 스스로 고생을 자처했을 뿐만 아니라 그런 자세를 신하들에게도 요구했다. 그 결과는 백성들의 태평성대로 이어졌다. 훌륭한 리더의 본질이 무엇인지 새삼 느낄 수 있는 부분이다.

 

참고
1) 조선의 노인 사냥꾼 “세종대왕”, 오늘의유머
2) 공무원들을 쥐어짜냈던 중국의 흙수저 출신 황제, 다음 이종격투기 카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