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의 모든 아버지께 이 장면을 바칩니다

신조어 중에 ‘웃프다’라는 말이 있다. 사동사 ‘웃기다’와 형용사 ‘슬프다’의 합성어로, 웃기면서도 마냥 웃을 수만은 없는, 아니 오히려 울고 싶은 상황에서 쓰는 말이다. 신조어이긴 하지만 이런 개념이 예전에 없었던 것은 아니다. 위대한 코미디언 찰리 채플린도 “삶은 가까이서 보면 비극이요, 멀리서 보면 희극이다.”라는 말을 남기기도 했다. “내가 웃는 게 웃는 게 아니야.”라든가 “아아 웃고 있어도 눈물이 난다.”처럼 유행가에도 적지 않게 웃픈 감정이 등장한다. 어쩌면 웃음과 슬픔은 한 종이의 반대편에 적힌 감성이 아닐까 싶다.

 

 

“내 꿈은 옛날에 부서졌단다.”

 

“몇 년 전인데요?”

 

“네가 올해로 몇 살이더라?”

 

“…”

 

한 커뮤니티에서 위 만화를 봤는데 딱 ‘웃프다’는 말이 생각났다. 사실 만화만 보자면 전혀 웃픈 내용이 아니다. 철없는 아버지의 헛소리쯤으로 치부하면 된다. 하지만 비슷한 상황에서 속으로 눈물을 삼켜야 한다면 이야기가 달라질 것이다. 그런 아버지가 등장했던 영화 한 편이 떠올라서 웃프게 느껴졌다. 그 영화는 바로 <빌리 엘리어트>다.

 

<빌리 엘리어트>의 주인공은 어렸을 적 엄마를 여읜 11살 소년 빌리 엘리어트다. 영국 북부 더럼에서 아버지와 형 그리고 약간 치매인 할머니와 함께 살고 있다. 아버지는 빌리에게 권투를 가르치려 했지만, 빌리는 같은 체육관에서 이뤄지는 발레 수업에 더 큰 관심을 보이게 된다. 아버지는 발레를 여자애들이나 하는 것으로 생각했고, 빌리에게 당장 발레를 그만두라고 하고, 빌리는 이에 좌절하고 만다.

 

 

영화는 발레를 좋아하는 아들과 마초적인 아버지 사이의 갈등이 중심이지만, 영화의 배경이 되는 시대와 공간을 알면 좀 더 깊이 있는 이야기를 엿볼 수 있다. 빌리가 살았던 1980년대 탄광 마을은 가혹한 시절을 겪고 있었다. 당시 영국 총리였던 철의 여인 마거릿 대처는 석탄 산업 합리화 정책을 강행하고 있었다. 사업성이 없는 광산은 문을 닫고, 이미 있던 곳도 직원 수를 줄이고자 했다. 당연히 노동자들은 반발했고, 노조는 장기파업에 돌입하며 이에 대항하고 있었다. (마거릿 대처는 사실상 현대 영국의 기틀을 마련한 뛰어난 지도자였지만, 동시에 많은 서민들의 눈에서 피눈물을 뽑아내 영국인들이 싫어하는 정치인으로 자주 거론되기도 한다) 파업이 길어지면서 빌리네 가족도 어려운 형편에 몰리게 된다. 결국, 땔감을 살 돈이 없어서 어머니의 유품이었던 피아노를 부수고 눈물을 흘리며 난로에 집어넣어야 했다.

 

 

아버지의 반대와 어려운 집안 형편에도 빌리는 발레를 포기할 수 없었다. 그러던 어느 날 친구와 춤을 추던 빌리는 그 모습을 아버지께 들키고 만다. 하지만 빌리는 물러서지 않았다. 아무 말 없이 격정적인 춤을 선보이며 자신이 발레를 얼마나 사랑하는지 온몸으로 보여주었다. 그 모습을 보던 아버지도 집에 가라고만 할 뿐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

 

 

그리고 다음 날, 아버지는 파업 시위에 참여하지 않았다. 대신 일 하러 가는 버스에 올라탔다. 다른 노조원들을 배신하는 행위였다. 남성성과 의리를 강조하는 아버지로서는 절대로 용납할 수 없는 행위였다. 이 모습을 본 빌리의 형은 대뜸 아버지에게 달려들었다.

 

“아버지! 여기서 뭐 하시는 거예요? 지금 포기하시면 안 돼요!”

 

“우리 꼴을 봐! 우리가 뭘 할 수 있겠어?”

 

“이러시면 안 돼요! 지금은 안 돼요! 여태까지 고생이 물거품이 돼요!”

 

“빌리를 위한 거야! 어쩌면 빌리는 발레의 천재일지도 몰라. 미안하다.”

 

“제발 이러지 마세요!”

 

“미안하다, 토니. 우린 끝장났어. 무슨 선택이 있니? 빌리에게 기회를 주자.”

 

 

누구에게나 꿈과 신념이 있다. 아무리 삶의 무게가 무거워도 절대 내려놓아서는 안 된다. 꿈을 잃으면 삶을 잃은 것과 마찬가지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하지만 빌리의 아버지를 두고서는 그런 말을 할 수 없을 것 같았다. 그는 자식의 꿈이 더 반짝이는 걸 발견했기 때문이다.

 

어느 우스운 만화를 보고 이 장면이 떠올라 글을 쓰며 조용히 눈물을 훔쳤다. <빌리 엘리어트>는 꿈에 관한 영화다. 꿈을 가지고 산다는 것이 얼마나 소중한 일인지 알려주고(빌리), 동시에 그 꿈을 위해 누군가가 눈물 흘려야 했다는 사실도 보여준다(아버지). 이런 게 인생이고, 그래서 아름다운 것 같다.

 

참고

1) PGR21, 포기한 아버지의 꿈

2) 영화 <빌리 엘리어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