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0,000
글깨나 쓴다는 소리를 듣다 보면 오만해지기기 쉽다. 사람들의 칭찬에 우쭐거리기 때문만은 아니다. 물론 뜨거운 호응을 받으면 어깨에 힘이 팍 들어갈 때도 있다. 그러나 뽕은 맞을 때 뿐이다. 시간이 지나면 그 또한 지나간다. 뽕 맛에 취해서 오만해지는 사람은 오래가지 않아 무너진다. 그런데 뽕쟁이가 아니더라도 오만해질 수 있다. 잠깐의 우쭐함을 넘어 꾸준히 성장하는 와중에도 오만해질 수 있다. 왜냐하면 성장하기 때문이다.
글을 쓰다 보면 조리 있게 쓰기 위해 생각이 많아진다. 앞뒤 문맥을 살피고 말이 되는지 따진다. 적확한 단어를 사용하여 내용을 깔끔하게 함축한다. 이런 고민을 매일매일 반복한다. 반복은 훈련이 되고 습관이 된다. 그렇게 성장한다. 평소에 책 한 권 안 읽고, 글 한 자 안 쓰는 사람과 차이가 벌어진다. 어쩔 수 없다. 인간의 사고 능력은 꾸준히 쓰지 않으면 낡는다. 우리나라 성인의 40%가 일 년에 책 한 권 읽지 않는다. 통계는 없지만, 글쓰기가 더 심하면 심했지, 덜 할 거라 생각지는 않는다.
이 차이가 오만함을 부른다. 조리 있게 말하는 것이 뭔가 대단한 능력이나 된다고 생각한다. 횡설수설하는 상대에게 말 좀 조리있게 해보라며 타박한다. 요점 정리가 안 되는 글에 짜증을 낸다. ‘저 사람은 제대로 말도 못하고, 생각이 없나?’ 이런 생각이 들 때도 있다.
표현하지 못한다고 생각조차 없는 건 아니다
그러나 말을 못 한다고 생각마저 없는 것은 아니다. 요즘 그를 볼 때면 그런 생각이 자주 든다. 그는 언어와 별로 친하지 않다. 책을 많이 읽지도 않고, 나를 만나기 전에는 영화도 좋아하지 않았다. 글을 쓰지도 않고, 달변가도 아니다. 종종 두서 없는 소리를 하기도 한다. 논리적인 서술에 있어 나와 실력 차이가 존재하는 게 사실이다.
그런데 종종 나를 깜짝 놀래킬 때가 있다. 전혀 뜬금없는 이야기를 하는 것 같은데, 곰곰이 생각해보면 핵심을 찌르는 경우가 많다. 특히 작품을 감상할 때 자주 느낀다. 그는 감상을 엉뚱하게 표현할 때가 있다. 그래서 무슨 뜻인지 다시 물어보고, 또 물어보고, 하다 보면 처음 표현한 말이 묘하게 핵심을 관통한다는 걸 깨닫게 된다. 내가 작품을 해부해가며 노트에 빼곡하게 의미를 적어나가고 있을 때, 그는 그냥 느껴버리는 것 같다. 그래서인지 설득력 있게 서술하지 못할 뿐, 나보다 더 많은 걸 느끼고 있다는 생각도 든다.
내가 오만함을 그대로 드러내는 무례한 사람이었다면, 그의 재능을 못 알아차렸을지도 모른다. 천만다행으로 나는 그의 생뚱맞은 소리를 들었을 때 무례하게 굴지 않았다. ‘그게 뭔 소리여?’, ‘진짜 생각이 없냐?’ 이런 소리는 절대 하지 않았다. 대신에 ‘그게 무슨 뜻이야?’, ‘자세히 알려줘.’, ‘이렇게 말해볼까?’라고 했다. 내가 예의 바른 사람이라는 자각은 없지만, 이런 걸 보면 부모님이 가정 교육을 잘 하신 듯하다.
그의 이야기를 듣다 보면 예술을 감상하는 데 있어 정답이 없다는 걸 절실히 느낀다. 세상에는 사람 수만큼 갖가지 감상이 존재할 것이다. 다만 모두가 조리 있게 표현하지 못할 뿐이다. 적절한 훈련만 한다면 그도 이동진이 되고 앙드레 바쟁이 될 수 있을 것이다. 어쩌면 위대한 수준에 오르는 데 있어 오히려 내가 불리할지도 모른다. 먼저 이해하고 나중에 느끼는 것보다, 먼저 느끼고 나중에 이해하는 게 훨씬 촉촉하기 때문이다.
글이란 결국 소통이다
세상에 천재는 있어도 바보는 없는 것 같다. 물론 바보 같은 짓을 하는 사람이 많긴 하지만, 시야가 좁아지면 원숭이도 나무에서 떨어지는 법이다. 사람이 아니라 상황이 바보를 만든다. 물론 꾸준히 바보짓을 하는 사람도 있다. 그래도 사람은 바보가 아니다. 굳이 바보를 꼽자면 신념일 것이다. 아무리 똑똑해봤자 멍청한 신념을 따르면 멍청한 짓을 할 수밖에 없다. (그래서 좋은 신념은 걸레처럼 너덜너덜해야 한다)
만약 주변에 바보가 널려있다고 생각된다면, 그건 정말 바보가 널린 것도 아니고, 자신이 천재인 것도 아니다. 아마 생각의 깊이에 큰 차이는 없을 것이다. 다만 그걸 끌어내는 소통이 부족할 뿐이다. 누구라도 진지하게 말할 기회를 주면 깊이 있는 이야기를 할 수 있다. 이를 말로 끌어내면 대화가 되고, 글로 풀어내면 글쓰기가 된다.
따라서 글쟁이는 친절해야 한다. 다른 이의 생각을 끌어내도록 도와주어야 한다. 그렇게 마음 속 생각을 친절하게 끌어내면 상대방을 감동시킬 수 있다. 그런 사람이 많아지면 인기글이 된다. 좋은 글은 그 와중에도 올바른 가치를 벗어나지 않고, 누군가를 차별하며 상처 주지 않는 것이다. 위대한 글은 이것을 국가나 시대 단위로 해내는 일이다.
겸손하고 친절해라
글깨나 쓴다는 소리를 듣는다면 겸손해야 한다. 말 좀 조리있게 한다고 생각마저 뛰어난 것은 아니다. 잘 훈련되었을 뿐, 똑똑한 게 아니란 말이다. 다행스럽게도 세상에는 내가 오만할 수 없도록 자괴감을 선사하는 훌륭한 글이 널려있다. 그들에 비하면 내가 얼마나 작고 하찮은 존재인지 깨닫게 된다. 그래도 정신 못 차리고 오만해지려 하면 여기저기서 나를 담금질한다. 인터넷 변두리의 작은 커뮤니티에서조차 얼마나 많은 지적과 꾸지람을 들어야 했던가. 실로 고마운 일이다. 긴 시간을 할애한 장문의 쓴소리에는 애정이 담뿍 담겨있다. 물론 약간의 우쭐함과 나 잘난 맛도 있겠지? 그 덕에 나는 반성하고, 고민하고, 발전할 수 있었다. 아직도 한참 모자라 떫은 처지이지만, 그래도 조금씩 익어가고 있음을 느낀다. 따가운 폭염도 햇살은 햇살인 셈이다. (물론 그저 비난하고 싶어서 비난하는 것은 신경 꺼야 한다)
꾸지람이 나에게서 겸손을 끌어내듯이, 나 또한 글을 통해 독자의 마음을 끌어내야 한다. 내가 떠올린 기막힌 생각은 다른 누군가가 이미 떠올렸을 것이다. 어디서도 볼 수 없다면, 단지 글로 표현하거나 실용화 하지 못했을 뿐이다. 그걸 끌어내어 텍스트로 바꾸는 게 글쓰기다. 예전에는 글쓰기란 ‘너에게 나를 보내는 일’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이제는 생각이 달라졌다. 나를 받아들이는 독자라면 애당초 나와 비슷할 확률이 높다. 사람들은 공감할만한 글에 공감한다. 잘 썼다고 공감하지 않는다.
글을 쓴다는 것은, 결국 ‘너에게 너를 보내는 일’이다. 나는 단지 글이라는 이름의 거울을 제공할 뿐이다. 그대가 이야기하고 싶은 생각을, 나의 잘 다듬은 필력으로 대변해주는 일이다. 그래서 친절해야 한다. 친절함이 독자와 소통하게 만들어 줄 것이다. 그렇게 통하게 되었을 때 상대의 욕망을 알 수 있고, 그 욕망을 풀어내주면 공감을 얻게 된다. 그런 사람이 천 명, 만 명을 넘어가면 좋은 글쟁이가 되는 게 아닐까?
본격적으로 글쓰기 시작한 지 5년이 지나서야 이걸 깨달았다. 나는 좀 느린 것 같다. 음… 그게 나쁘진 않은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