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어렸을 적 봉천6동 한 작은 골목에 살 때만 해도 이웃이란 단순히 물리적으로 가까운 위치에 사는 사람이 아니었다. 먼 친척보다 낫다던 ‘이웃사촌’이었다. 나만 해도 동네 형들 집에서 저녁도 먹고, 집에 문이 잠겨 있으면 옆집에도 가 있곤 했다. 그렇게 이웃은 함께 살아가는 공동체였다.
하루는 어머님이 편찮으신 적이 있었는데, 옛날에 한 골목에 같이 살았던 아주머니 다섯 분께서 병문안을 오셨다. 아주머니들을 20년 만에 보니 정말 반가웠지만, 한편으로는 많은 생각이 머리를 스치고 지나갔다. 아파트 한 채에는 수백 명의 사람이 그 작은 땅덩어리 위에서 함께 사는데, 누가 아픈지 알기는 고사하고 누가 어떻게 사는지도 모른다. 심지어 엘리베이터에서 인사도 안 하는 현실이 서글프게 느껴졌다.
왜 이렇게 되었을까? 환경이 우리의 사고방식에 영향을 미치듯이 아파트의 물리적 구조 때문에 이렇게 된 것이 아닌가 싶다. 예전에 골목에서 살 때는 집들이 나란히 ‘수평적’으로 위치해 있었다. 어떤 사회적 조건을 떠나서 포지션만 보면 평등한 관계였던 것이다. 하지만 아파트의 구조는 꼭 현대 관료제의 모델처럼 ‘수직적’이다. 관계의 구조가 수직적이 되면 포텐셜이 생기고, 그 포텐셜은 에너지를 만들어 낸다.
진짜로 아파트는 그런 에너지를 안타깝게도 부정적 에너지로 만들었다. 바로 ‘층간 소음’이다. 이제 아파트에 함께 사는 사람은 이웃이 아니라 피해자와 가해자의 관계가 되었다. 당장 아파트를 다 없앨 수도 없는 노릇이고, 다시 이웃사촌이라는 시너지가 큰 관계로 돌아가려면 부단히 의식적으로 노력하는 수밖에 없는 것 같다.
그래서 나는 새로 이사 온 아파트에서는 이등병이 고참 기침 소리만 나도 경례하는 것처럼 열심히 인사한다. 인사에 냉담하고 소극적인 분이 대부분이지만, 사람 마음 녹이기 최강 병기인 우리 아기와 협공하니, 많은 분이 무장해제 되면서 조금씩 반겨주시고 인사도 먼저 해주시기 시작했다. 늘 말하듯이 정치/경제/기술/과학 같은 거창한 이야기만 주야장천 할 것이 아니라 우리 삶의 근간을 다지는 조금은 이타적인 기본부터 집중해야 한다. 그래야 우리 아이들이 살아갈 이 나라에 좀 더 희망이 있지 않나 생각해본다. ‘거대 담론’ 말고 이웃과 ‘소박 담소’ 나누는 세상이 되었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