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대중매체에서 가장 흔하게 볼 수 있는 괴물은 ‘좀비’가 아닐까 싶다. 그 이유는 아무래도 고전적인 괴물인 뱀파이어나 늑대인간에 비하면 현실적이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물론 본래 좀비의 기원은 부두교 주술에 의해 움직이는 시체였지만, 최근에 등장하는 좀비는 바이러스에 의한 감염의 형태로 묘사되고 있다. 마법과 미신이 사라진 세상에서 가장 그럴듯한 괴물이 바로 좀비인 셈이다.
좀비가 대중화되면서 할리우드뿐만 아니라 우리나라에서도 <부산행>이나 <킹덤>처럼 대규모 자본이 들어간 작품이 나오고 있다. 저예산 B급 분야까지 살펴보면 정말 셀 수 없을 만큼 많은 좀비 영화가 존재할 것이다. 이토록 좀비 장르가 흥행하는 데 결정적인 영향을 끼친 작품이 2편 있다. 잭 스나이더 감독의 <새벽의 저주>와 대니 보일 감독의 <28일 후>이다. 기존의 느릿느릿한 움직임을 탈피하고 미친 듯이 뛰어다니는 좀비와 감각적인 영상/편집으로 좀비 영화의 신세기를 열어젖힌 작품이었다.
둘 중 최고의 작품을 꼽으라면 나는 단연코 <28일 후>를 고를 것이다. 많은 사람들이 꼽는 최고의 좀비 영화이며, 20년이 지났어도 여전히 강렬한 몰입도와 매력을 선사하는 작품이라고 생각한다. 게다가 흔한 오락 영화를 넘어 의미 있는 메시지를 선사하는 작품이기도 하다.
1) 가장 매력적인 포스트 아포칼립스
인류 문명이 멸망한 이후의 세계관을 다룬 장르를 ‘포스트 아포칼립스’라고 한다. <28일 후>의 경우 좀비 바이러스가 퍼진 뒤 고작 28일밖에 지나지 않았기 때문에 포스트 아포칼립스로 구분하기에는 애매한 면이 있지만, 해당 장르 특유의 감성을 잘 살려냈다는 점은 부정할 수 없을 것이다. 아무도 없는 텅 빈 거리에서 주인공 짐이 ‘Hello’를 외치는 장면은 압도적인 황량함을 선사한다.
하지만 <28일 후>가 매력적인 것은 절망적인 풍경 때문이 아니다. 오히려 그 반대 감성을 자극한다는 점에서 여타 포스트 아포칼립스 영화와 차별화한다. 영화 중반 짐, 셀레나, 프랭크, 해나 4인이 만나 안전한 장소를 찾아 여정을 떠난다. 프랭크와 해나가 부녀지간이라는 점을 빼면 네 사람은 거의 완벽한 남남에 불과했다. 하지만 쇼핑도 하고(전부 무료), 캠핑도 하며 네 사람은 어느새 가족이 된다. 이 모습이 절망 속에 피어난 작은 희망을 느끼게 한다. 여타 좀비 영화에서는 느끼기 힘든 독특한 감성이었다.
2) 배우들의 열연
영화를 처음 볼 때는 독특한 설정과 현란한 영상에 쉽게 인식하지 못했지만, 영화를 다시 볼수록 눈에 띄는 것이 바로 배우들의 열연이었다. 지금 보면 정말 쟁쟁한 배우들이 등장한다. 하지만 영화 개봉 당시만 해도 대부분의 배우들이 무명이었다. 하지만 그들은 영화에서 강렬한 연기를 선보였고, 이 영화를 통해 명성을 쌓아 할리우드 대표 배우로 거듭났다.
짐 역을 맡은 킬리언 머피는 시작부터 전신 노출을 보여주는 파격적인 연기를 선보인다. 이후 상황 파악 못 하는 어리바리한 모습부터, 극 후반 광란에 휩싸이는 모습까지 다양한 이미지를 선보이는데, 영화 초반과 후반을 따로 떼어놓고 보면 이 배우의 연기 스펙트럼이 얼마나 넓은지 어렵지 않게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킬리언 머피는 <28일 후>로 주목받은 후 <배트맨 비긴즈>, <인셉션> 등 크리스토퍼 놀란 감독 작품에 주로 등장하며 할리우드 대표 연기파 배우로 자리 잡았다.
셀리나 역을 맡은 나오미 해리스도 당시에는 영화에 진출한 지 얼마 안 된 배우였다. (데뷔는 9살이었지만 주로 TV 프로그램에 출연했다) 좀비물에 주로 등장하는 민폐형 여성과는 달리, 탁월한 생존능력을 가진 강인한 여성을 선보이며 이제껏 볼 수 없었던 독특한 캐릭터를 완성한다. 들고 다니는 무기도 무려 마체테. 그녀의 독특한 매력은 이후 필모그래피에도 이어져 <캐리비안의 해적>, <007> 시리즈에 등장하며 세계적인 배우로 거듭났다.
택시기사이자 해나의 아버지 프랭크 역을 맡은 브렌던 글리슨도 언급하지 않을 수 없다. 그는 <28일 후> 이전에 이미 탄탄한 필모그래피를 가졌으며, 연기력을 인정받는 베테랑 배우였다. 킬리언 머피와 나오미 해리스가 풋풋한 모습을 보여주는 데 반해 이들의 에너지를 포용하는 안정적인 연기를 보여주는 것이 특징이다. 하지만 필요한 순간에는 강렬한 모습도 보여주는데, 바이러스에 감염된 직후 가족을 헤치지 않으려고 애쓰던 장면은 브렌던 글리슨의 내공을 제대로 느끼게 해준다. (아들도 세계적인 배우가 됐는데 <어바웃 타임>으로 유명한 도널 글리슨이다)
3) 진짜 괴물은 누구일까?
안전한 지역이 있다는 라디오 방송을 따라 네 사람은 맨체스터로 향한다. 하지만 도착해 보니 실상은 예상과 전혀 달랐고, 그 와중에 프랭크는 바이러스에 감염돼 사살당한다. 짐, 셀리나, 해나는 군인들을 따라가지만, 그들을 기다리고 있던 것은 안전한 보금자리가 아닌 또 다른 지옥이었다. 군인들은 시민을 보호하기 위해 방송한 것이 아니었다. 방송을 듣고 찾아온 여자들을 성노예로 쓸 심산이었던 것. 짐은 셀레나와 해나를 데리고 탈출하려 하지만 이내 붙잡혀 총살당할 위기에 처한다. 하지만 짐은 기지를 발휘하여 군인들을 따돌리고 셀레나와 해나를 구하기 위해 기지로 돌아온다. 그 과정에서 갇혀있던 감염 생포자를 풀어줘 기지를 쑥대밭으로 만들고, 남은 군인들과 육탄전을 벌이며 탈출을 도모한다.
<28일 후>의 엔딩은 여러모로 극찬을 아낄 수 없다. 우선 관객이 전혀 예상치 못한 의외의 전개를 보여준다. 자신들을 지켜줄 줄 알았던 군인들이 알고 보니 좀비보다 더 위협적인 존재였다는 전개는 정말 신선했다. (개인적으로 <기생충>급 전개였다고 본다) 그 전에 훈훈한 장면을 보여주며 관객을 안심시키던 영화는 결말에 이르러 확실한 지옥을 선사하면서 좀비 영화라는 정체성을 확고하게 각인시켰다.
예상치 못한 전개가 가진 메시지는 <28일 후>가 역대 좀비 영화 중 최고의 작품으로 거듭나게 한 핵심이다. 군인들이 악당이었다는 점도 끔찍한데, 그들이 저지르는 악행의 종류는 더 끔찍했다. 군인들은 여성들을 성노예로 쓰려고 했는데, 일제강점기 일본군 ‘위안부’라는 역사를 배운 한국인에게는 소름 돋는 발상이 아닐 수 없었다. 이쯤 되면 좀비가 괴물인지 군인들이 괴물인지 분간이 안 될 정도.
이런 군인들을 처단하는 짐의 모습도 아이러니하게 다가온다. 짐은 거의 맨손으로 군인들을 쓰러뜨리는데, 사람을 맨손으로 죽이는 모습을 정말 끔찍하게 묘사한다. 셀리나와 해나도 그런 짐을 보고 감염자로 착각할 정도. 마치 괴물을 상대하기 위해 스스로 괴물이 되어버린 것 같았다. 이쯤 되면 군인들이 괴물인지, 짐이 괴물인지 분간이 안 될 정도.
보통 영화였다면 짐이 군인들의 악행을 저지하며 ‘너희들이야말로 진짜 괴물이야’라는 대사를 던졌을 것 같은데, <28일 후>에서는 주인공마저 괴물이 된다. 뻔한 교훈을 넘어서 ‘진짜 괴물은 누구인지’ 관객을 고민하게 한다. 여기서 영화 초반 바이러스에 관한 언급을 다시 떠올리게 된다. 바이러스를 연구하던 과학자는 감염원이 분노(rage)라고 했는데, 좀비들의 격양된 몸짓, 군인들의 욕구불만, 그리고 짐의 광란까지, 영화는 작중 내내 괴물의 모습에서 분노를 포착하고자 한다. 그런 면에서 분노에 휩싸이면 누구라도 괴물이 될 수 있다는 의미로 받아들여지기도 한다. 동시에 인간 본능에 내재된 폭력성을 인정할 수밖에 없도록 만든다. 누구나 괴물이 될 씨앗을 마음속에 품고 있는 셈이다.
기지를 빠져나온 짐, 셀리나, 해나는 외딴집에 머물며 구조를 기다린다. 그들은 천으로 바닥에 커다란 글자를 써놓는데, 짐의 첫 대사와 수미쌍관을 이루며 긴 여운을 선사한다. 황량함, 긴박감, 훈훈함, 끔찍함에 마지막 여운까지. <28일 후>는 좀비 영화가 보여줄 수 있는 모든 감성을 2시간 만에 전부 보여주는 걸작이다. 혹시 아직 영화를 보지 않았다면 꼭 보길 바란다. (단, 좀비 영화라 피칠갑은 기본이니 감안하길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