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소에는 온화하다가도 운전대만 잡으면 난폭하게 돌변하는 사람이 있다. 원래 성격이 그렇다는 사람도 있지만, 심리학적으로 살펴보면 왜 사람이 돌변하는지 그 이유를 알 수 있다. 어째서 운전대만 잡으면 돌변하는 사람이 있는 걸까?
모든 동물은 자신의 영역을 표시하고 지키고자 한다. 이를 통해 신체 주변의 일정 공간을 자신의 영역으로 규정한다. 이는 인간도 마찬가지다. 미국의 인류학자 에드워드 홀은 인간의 공간 욕구를 밝혀내어 ‘근접학(proxemics)’이라는 색다른 개념을 제시했다. 이에 따르면 사람은 어디를 가나 자신 주변의 개인 공간인 ‘공기 기둥’을 두르고 있다고 한다. 그래서 공기 기둥이 침범당하면 공격성을 드러내기도 한다. 또한, 친밀한 정도에 따라 상대방에게 허용하는 범위도 달라진다고 한다.
1. 친밀한 거리
15~45cm 사이의 공간으로 사람들이 사유 재산처럼 여길 정도로 중요하게 생각하는 영역이다. 가족, 연인, 친한 친구, 애완동물 등 감정적으로 가까운 존재에게만 접근을 허용한다. 친밀한 영역 안에는 반경 15cm 정도의 하위 영역이 있는데, 이 공간은 오직 친밀한 신체 접촉을 할 때만 타인이 들어올 수 있다.
2. 사적인 거리
46cm~1.2m 사이의 공간으로 파티, 회식, 사교 모임, 친구들과의 만남 등 어느 정도 친분이 있는 사람과 두는 거리이다.
3. 사회적 거리
1.2m~3.6m 사이의 공간으로 택배원, 우편배달부, 동네 상점 주인, 신입 직원 등 낯선 사람과 떨어져 서는 거리이다.
4. 공적 거리
3.6m 이상의 공간으로 대규모 군중을 대상으로 연설할 때 이 정도 거리를 두어야 편안함을 느낀다고 한다.
이처럼 친밀한 정도에 따라 허용하는 거리가 다르기 때문에 낯선 사람이 사적인 거리나 친밀한 거리를 침범하면 심리적 변화가 일어난다. 심장 박동이 빨라지고, 아드레날린이 분비되며, 혈액이 뇌와 근육으로 몰린다.
따라서 친근함을 과시하기 위해 억지로 접근하거나 팔을 두른다면 오히려 상대에게 부정적인 감정을 갖게 할 수도 있다. 사람들과 편안한 관계를 유지하기 위해서는 적당한 거리를 유지해야 한다. 당신이 처음으로 회사에 출근한 신입사원이라면 사람들이 당신에게 거리를 두고 다소 냉정하게 보이는 것이 당연하다. 당신을 알게 될 때까지 사회적 거리를 두는 것뿐이다. 동료들과 친해지면 언젠가는 사적인 거리나 친밀한 거리로 들어가게 된다.
하지만 어쩔 수 없이 친밀한 거리를 침범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 있다. 엘리베이터를 타거나 대중교통을 이용하면 생판 모르는 사람과도 온몸을 맞대야 한다. (출근길 9호선… 지옥철…) 이럴 때 사람들은 다른 사람과 눈을 맞추지 않은 채 포커페이스를 유지하며 되도록 몸을 움직이지 않는다. 엘리베이터를 탔다면 층수가 바뀌는 것만 쳐다보기도 한다. 이러한 행동을 ‘가면 쓰기’라고 부르는데, 자신의 불편한 감정을 숨기기 위한 행동이다. 많은 대중문화에서 출근길 풍경을 불행하고 비참한 것으로 묘사하지만, 사실은 진짜 불행한 것이 아니라 그저 자신의 속마음을 숨기고 있는 것뿐이다.
그럼 운전대를 잡은 사람이 난폭하게 돌변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차 안에서는 개인 공간을 충분히 확보할 수 있는 것 아닐까? 자동차에는 개인 공간의 크기를 확대하는 효과가 있다. 경우에 따라 평소의 10배까지 확대되어, 자동차 앞뒤로 8~10m 정도를 개인 공간으로 생각하기도 한다. 그래서 다른 차가 끼어들면 위험한 상황이 아님에도 화를 내 거나 공격적으로 변하기도 한다. 우리가 성격의 문제라고 생각했던 바탕에는 이처럼 심리학적 효과가 자리하고 있다.
참고 <당신은 이미 읽혔다>, 앨런 피즈, 바바라 피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