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세기 최고의 작품을 꼽으라고 하면 반드시 포함되어야 할 영화가 <반지의 제왕> 3부작이라고 생각한다. 개봉 당시에는 컴퓨터 그래픽으로 구현한 완벽한 판타지 세계에 빠져들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고 나서 이 영화가 위대한 다른 이유들이 더 많이 발견되었다. 방대한 소설의 이야기를 완벽하게 압축한 각본부터 인간성의 위대함과 추악함을 모두 담아낸 뛰어난 연출까지. 이후에 더 좋은 그래픽으로도 <반지의 제왕>만 한 판타지 영화가 나오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 이 영화의 위대함을 더욱 돋보이게 만들고 있다. (심지어 같은 감독이 같은 세계관을 다룬 <호빗>조차 반지의 제왕보다 못했다 ㅠㅠ)

내가 가장 감탄하는 지점은 <반지의 제왕>이 인간성의 위대함과 추악함을 모두 담아냈다는 점이다. 그런 면에서 영화의 표면적인 주인공은 프로도이지만, 영화의 주제를 드러내는 진정한 주인공은 샘과 골룸이 아닐까 싶다. 샘이 인간성의 숭고함과 위대함을 상징한다면, 골룸은 인간성이 어디까지 추락할 수 있을지 보여주는 캐릭터라고 하겠다.

그런데 골룸을 연기한 배우가 따로 있다는 얘기를 하면 놀라는 분들이 꽤 있다. 100% 컴퓨터 그래픽으로 구현한 캐릭터라서 행동이나 표정도 애니메이션처럼 만들었다고 생각하겠지만, 골룸의 연기는 배우에게 장비를 입혀 ‘모션 캡처’ 방식으로 구현한 것이다. 이렇게 골룸을 연기한 배우가 바로 ‘앤디 서키스’다.

그는 연극배우로 시작해 영화계에 진출한 실력파였지만, 20년 넘게 무명 시절을 보내야 했다. 그런 그가 처음으로 인지도를 쌓은 영화가 바로 <반지의 제왕> 시리즈의 골룸이었다. 이후 그는 골룸의 경력을 바탕으로 다양한 모션 캡처 캐릭터를 연기하였고, 모션 캡처 전문 배우라는 타이틀이 붙을 정도였다. 모션 캡처 연기를 부정하는 사람도 있지만, 앤디 서키스의 풍부한 몸짓과 표정이 아니었다면 이토록 생생한 CG 캐릭터가 나올 수 없었을 거라며 그의 연기력을 높게 평가하는 게 일반적이다.

그런데 앤디 서키스가 골룸 역을 제안받았을 때 주변 동료는 그를 만류했다고 한다. 동료들이 그의 얼굴이 영화에 나오냐고 물었을 때, 앤디가 “No, it’s not.”이라는 말밖에 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무명 배우 시절을 오래 겪었기에 ‘얼굴 없는 배우’로 출연하는 것을 부정적으로 생각할 만하다. 기껏 몇 개월에 걸쳐 힘든 촬영을 소화해도 배우의 경력에 전혀 도움이 안 될 수도 있기 때문이다.

개인적으로 제작사와 피터 잭슨 감독의 선택도 조금 의아했다. 보통 이런 얼굴 없는 배우가 등장한다고 하면 유명 배우를 섭외해서 홍보 효과를 높이거나 캐릭터의 연기력에 정당성을 부여하려고 할 것이다. 하지만 피터 잭슨은 배역 대부분을 당시에는 무명이었던 배우로 기용했고, 이는 골룸 역도 마찬가지였다.

그렇게 ‘얼굴 없는 배우’로 출연한 결과는 어땠을까? 이제 그는 할리우드에서 시청자가 가장 많은 토크쇼들에 출연하는 대스타가 되었다. 앞서 말했듯이 모션 캡처 분야에서는 세계 최고라고 불리고 있고, 추후에는 자기 얼굴로 어벤져스 시리즈 같은 블록버스터 영화에 출연하기도 했다.

이런 결과를 두고 ‘골룸을 맡은 것이 탁월한 선택이었다’, ‘그런 배역을 맡을 수 있었다니 운이 좋았다’라고 말하기도 한다. 물론 운이 좋기는 했지만, 단지 운만 좋아서 이뤄진 결과는 아니라고 생각한다.

앤디가 처음 촬영장에 등장했을 때, 다른 출연진들은 그를 동료 연기자로 대우하지 않았다고 한다. 골룸이 나오는 장면에서 그가 같이 연기를 한다는 말에는 “성우가 촬영장에 왜 나와요?”라고 의아해했을 정도. 하지만 그가 연기하는 모습을 보고는 모두의 생각이 바뀌었다. 꼭 전문 배우가 아니라도 촬영 현장 사진만 보면 앤디가 얼마나 열정적으로 연기에 임하는지 그 에너지가 느껴질 정도다. 그런 노력이 그를 배우로 인정하게 만들었고, 결국 지금의 인지도와 성공을 가져온 셈이다.

나는 실력이란 기회를 성공으로 바꾸는 능력이라고 생각한다. 실력이 있다고 모두 성공하는 것은 아니지만, 실력이 없으면 그럴 기회가 와도 성공을 얻을 수 없다. 만약 앤디에게 열정과 실력이 없었다면 모션 캡처 연기자가 한 명의 배우로서 인정받을 수 있었을까? 앤디의 실력은 자신의 성공을 이뤄냈을 뿐만 아니라 해당 분야 전체의 위상을 드높이는 업적까지 낳았다. 내가 아는 배우 중에 가장 실력 있는 배우가 바로 앤디 서키스가 아닐까 싶다.

참고 : Andy Serkis Was Advised Against Playing His Now-Iconic Role, Cinema Blen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