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지금까지 단기기억(short-term memory)과 작업기억(working memory)을 혼용해서 썼다. 아마 다른 책에서도 작업기억과 단기기억을 함께 쓰는 경우를 본 적이 있을 것이다. 그냥 단기기억이면 단기기억이라고 할 것이지 ‘기억하기 힘들게’ 굳이 작업 기억이라는 용어를 새롭게 만들었을까?
심리학자들은 예전부터 아주 짧은 시간 동안 정보를 담고 있는 단기기억 체계가 우리에게 있음을 알아냈다. 그리고 대부분의 연구는 단기기억의 특징을 알아내는 것이었다. 1970년대 초 알랜 배들리 등은 그동안 수행되었던 많은 단기기억 연구를 검토했다. 검토 결과 그들은 연구자들이 정작 ‘단기기억은 도대체 무엇을 하려고 존재하는 것인가?’라는 핵심적인 질문에 대해서는 진지하게 접근하지 않았다는 것을 알았다.
알랜 팀은 추가적인 연구 끝에 단기기억은 우리의 정신 속에 상호 관련된 정보들을 동시에 유지하면서 ‘작업(working)’하고 그것을 적절히 사용하도록 한다는 사실을 밝혀냈다. 다시 말해 작업기억은 단순히 정보를 저장하는 것에 그치지 않고 그 정보로 능동적인 작업을 하기 위해 존재한다.
작업기억은 기억이라는 단어가 있어서 ‘저장소’ 같지만, 실제는 저장소라기보다 ‘작업대’에 가깝다. 이 작업대 위에서 새로운 정보와 장기기억이라는 재료가 함께 어우러져 목적에 맞게 조직화된다. 그리고 다른 작업을 하기 위해 재료는 빠르게 처리된다. 작업대에 재료가 계속 있으면 다른 작업을 할 수가 없지 않은가?
연구가 거듭될수록 단기기억이 작업을 위한 인지 과정임이 더 명백히 밝혀졌고 이후 학자들은 ‘단기기억’이라는 말보다 ‘작업기억’을 더 많이 쓰게 되었다. 그래서 우리는 같은 의미가 있는 두 개의 단어를 보게 된 것이다. 이제부터 우리 또한 이 책에서 ‘단기기억’이라는 단어보다는 의미가 더 명확한 ‘작업기억’이라는 단어를 주로 사용하겠다.
한동안 작업기억은 5~9개 정도의 재료를 담을 수 있는 하나의 작업대가 존재한다고 생각해 왔다. 1955년 조지 밀러는 <마법의 숫자 7±2 : 정보처리 능력의 한계>라는 유명한 논문을 발표한다. 그는 다양한 테스트를 통해서 사람들은 적으면 5개 많으면 9개의 항목을 기억한다는 것을 알아냈다. 그러나 다루는 항목이 그보다 많을 때 일관된 오류를 보였다. 예를 들어 5927을 기억하기는 어렵지 않지만, 5984052942를 바로 기억해 보라고 하면 쉽게 하지 못했다.
하지만 이후 인지 심리학의 발달로 우리의 작업대가 하나가 아님을 알아냈고 심지어 작업대에 올릴 수 있는 정보가 단순히 7개 숫자나 7개 색깔 같은 것이 아님을 밝혀냈다. 작업기억은 뜻밖에 복잡한 인지 체계였으며 그것을 제대로 이해한다면 작업장에서 품질뿐만 아니라 양적으로 더 많은 상품을 만들 수 있다.
작업기억의 역할에 대해 제대로 밝힌 배들리 연구팀은 과연 조지 밀러의 연구가 맞는지를 알아보려고 흥미로운 실험을 했다. 밀러의 실험에 따라 실험 참가자들에게 숫자 8개를 무작위로 배정하여 순서대로 외우게 했다. 그리고 동시에 숫자 암송과 다른 공간 추론 과제를 함께 냈다. 만약 작업기억의 한계가 7±2라면 암송과 공간 추론 과제를 동시에 잘할 수는 없을 것이니 말이다. 하지만 실험 참가자들은 2가지 과제를 아무런 어려움 없이 실행했다. 밀러가 제시한 한계를 극복하고 더 많은 과제를 작업기억으로 수행해낸 것이다.
암송해야 할 숫자가 15개, 20개라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 암송은 당연히 힘들었다. 밀러의 7±2의 한계선이 작용하는 듯했다. 하지만 암송을 못 했을지라도 추론 과제는 모두 재빠르게, 그리고 95%의 정답률로 풀었다. 이 말은 작업기억의 작업대가 하나가 아님을 강력히 시사한다.
이후 연구를 통해 작업기억은 ‘음운회로(phonological loop)’, ‘시공간 메모장(visual-spatial sketchpad)’, ‘일화완충기(episodic buffer)’, ‘중앙집행기(central executive)’라는 4개의 작업장이 있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음운회로는 단어와 소리를 단기간 저장하는 체제이며 계산을 다 할 때까지 공식과 도형을 일시적으로 보관한다. 당신이 ‘음운회로’라는 단어를 읽을 때 속으로 이 단어를 소리 내었음을 알 수 있을 것이다. 이를 하위발성(subvocalization)이라고 하는데 음운회로는 이때 짧은 시간 동안 제한된 수 안에서 활성화된다.
시공간 메모장은 말 그대로 시각과 공간 정보를 처리한다. 시공간 정보를 그냥 저장할 수도 있고 언어를 시공간화하여 저장할 수도 있다. 하지만 시공간 메모장 또한 일시적이고 한계가 있다. 우리는 운전을 하면서 라디오로 축구 경기를 청취하는 데 큰 문제가 없다. 하지만 축구 경기를 들을 때 상세한 심상(mental image), 즉 이미지를 그려 가면서 들으면 운전을 제대로 할 수가 없다. 실제 실험에서 축구 방송을 들을 때 심상을 떠올려 보라고 했더니 중앙선 침범이 잦았다. 이로써 시공간 등 두 개의 심상을 모두 요구하는 과제 수행이 어렵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앞서 8개의 숫자 암송과 공간 추리 과제를 동시에 진행했던 실험을 기억하는가? 축구 경기에 대한 심상을 그리면서 운전하는 것은 어려웠지만, 숫자를 암송하면서 공간 추리 과제를 하는 것은 손쉽게 했다. 여기서 우리는 4개의 작업대는 서로 독립적이라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숫자 암기는 음운회로이고 공간 추리 과제는 시공간 메모장을 사용하는 데 서로의 기억을 간섭하지 않는다. 즉, 이 둘을 동시에 사용한다면 작업기억 용량이 늘어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하지만 연구에 따르면 8세 이후부터는 시각적인 형태로 제시되는 자극들을 언어적으로 명명하는 경향이 있다. 예를 들어 어떤 모양을 보고 ‘이것은 사각형 안의 원이야’라는 식으로 기억한다는 것이다. 시각적 메모장으로 기억하는 것을 음운회로로 기억하지 않는 것을 통해 더 넓은 작업기억을 확보할 수 있다.
일화완충기는 가장 최근에 제시된 작업기억 모형으로 음운회로, 시공간 메모장, 장기기억에서 나온 정보를 모으고 조합하는 임시저장고 역할을 한다. 당신의 이전 경험들을 해석하고 새로운 문제를 해결하며 미래 활동을 계획하도록 능동적으로 조작하는 곳이기도 하다. 또한, 이전에 서로 연결된 적 없는 어떤 개념들을 통합하도록 해 준다. 예를 들어 당신은 일화완충기를 이미 공부했던 음운회로, 시공간 메모장을 작업기억이라는 개념에 통합 시켜 장기기억 속으로 보낼 수 있다. 일화완충기는 임시 저장 체계이지만, 여기서 생성된 개념이나 복잡한 심상은 장기기억 속에 저장될 수 있다.
마지막으로 알아볼 작업기억 작업대는 중앙집행기다. 중앙집행기는 작업기억 체제에서 CEO 역할을 한다. 음운회로, 시공간 메모장, 일화완충기 및 장기기억의 정보 흐름을 통제하고 통합한다. 관련이 없는 정보를 의도적으로 무시하는 역할도 중앙집행기가 담당한다. 그러므로 중앙집행기는 당신이 무엇을 할 것인지, 무엇을 하지 말아야 하는지를 결정하는 데 말 그대로 ‘결정적인’ 역할을 하는 셈이다. 어떤 공부법을 활용할 것인지 수학 문제를 어떻게 공략할 것인지 또한 중앙집행기의 역할이다. 중앙집행기는 나머지 세 개의 작업대와는 다르게 임시 저장체계가 없으며 작업기억답게 한계가 있다. 수학 문제 공략과 친구와 화해하는 가장 좋은 방법이 뭔지를 동시에 다룰 수 없다.
지난 10년 동안 나온 작업기억과 학업에 대한 연구를 종합해 보면 작업기억 과제와 관련된 점수는 아이큐뿐만 아니라 학점과도 매우 밀접한 관계가 있음이 증명되었다. 특히 음운회로 점수와 독서 능력은 높은 상관관계가 있으며 중앙집행기 과제 점수는 언어 능력, 읽기 이해, 추론 능력, 노트 필기 기술 등 공부 전반에 걸쳐 밀접한 관계가 있음이 드러났다. 주의력결핍 과잉행동장애(ADHD)를 겪는 아이들은 일관적으로 중앙집행기 과제를 잘 수행하지 못하는 경향이 있다.
그렇다면 어떻게 작업기억 능력을 향상시킬까? 우리는 앞서 공부한 것을 토대로 세 가지를 추론할 수 있다. 먼저 가장 중요한 것은 앞으로 많은 장기기억을 갖는 것이다. 예를 들어 395020592810247이라는 15자리 숫자를 보고 바로 기억해 내라고 하면 너무나 어렵다. 하지만 1234567891011121 이건 어떤가? 아마도 대부분 쉽게 할 수 있을 것이다. 왜냐하면 우리는 1부터 12까지 숫자의 순서를 이미 알기 때문에 1~12까지 숫자와 숫자 1만 기억하면 된다. 15자리 숫자를 순식간에 기억할 수 있다면 작업기억의 작업대에 더 많은 재료를 올려놓을 수 있고, 그렇다면 더 복잡하고 더 어려운 과제를 해결할 확률을 높일 수 있다. 결국, 특별한 꼼수가 있기보다 작업기억 능력의 확장은 얼마나 많은 공부를 하느냐와 많은 것을 알고 있는가에서 결정된다.
더불어 새로운 정보를 기존 기억과 연결하고 통합하는 연습을 해야 한다. 예를 들어 1~12까지 숫자의 순서를 알고 있다 한들 15자리 숫자 과제에 그것을 적용하지 못한다면 과제를 제대로 풀 수 없을 것이다. 이미 공부했던 내용과 새로운 정보를 통합하는 노력을 하게 된다면 작업기억의 작업대는 더 훌륭해질 것이다.
마지막으로 앞서 언급했던 시공간 메모장을 활용하는 것을 음운회로로 치환하지 않도록 노력해야 한다. 다시 말해 이미지를 잘 활용하고 그림으로 해결할 수 있다면 그렇게 하는 것이 좋다. 위대한 과학자나 예술가들은 심상을 통해 대상을 이해하는 경우가 매우 많았다. 오히려 말로 설명하기가 더 힘든 것이 많다고 표현할 정도다. 심상과 소리는 서로 독립적이기 때문에 둘 다 활용한다면 작업기억의 용량이 더 커질 것이다. 시공간적 자료 활용을 적극적으로 하는 것도 좋은 방법이다. 2003년에 있던 연구에서 언어적 설명과 시각적 표상을 결합하면 학생들이 더 많이 학습할 수 있다는 것이 밝혀졌다.
이 모든 방법은 모두 메모리 챔피언십에 나온 기억 전문가들이 활용하는 방법들이다. 당신의 작업기억 능력도 노력한다면 충분히 발전할 수 있다.
참고 <완벽한 공부법>, 고영성·신영준 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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