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 제목을 이렇게 붙였을까?

 

처음 이 제목을 보았을 때 떠오른 것은 노인빈곤율 같은 사회 문제였다. 그래서 나름 현실적이면서도 어둡고 무거운 사회 비판적인 메시지를 가진 영화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영화를 보고 나니 어둡고 무겁긴 하지만 사회 비판과는 전혀 상관없는 이야기가 펼쳐졌다.

 

주인공 르웰린 모스는 어느 날 갱단의 총격전 현장을 목격한다. 정확히는 총격전 이후 죽어있는 시체를 발견한 것이다. 르웰린은 그곳에서 거액이 든 돈 가방을 발견하게 된다. 하지만 그것이 독이 든 성배라는 것을 그때는 알지 못했다. 갱단은 돈을 찾기 위해 안톤 쉬거를 고용한다. 영화는 이 두 사람의 쫓고 쫓기는 추격전을 다루고 있다.

 

당연하게도 ‘노인’에 관한 이야기는 나오지 않는다. 주인공이라 할 수 있는 르웰린 모스와 안톤 쉬거는 많이 쳐줘야 40대의 한창나이이고, 영화에서 ‘노인’이라고 부를만한 등장인물인 보안관은 사실상 하는 일이 별로 없다. 노인 예찬론도 아니고, 사회 비판도 없다. 그런데 왜 ‘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라는 제목이 나온 걸까? 이를 이해하고 싶다면 안톤 쉬거라는 인물을 분석해야 한다.

 

 

사실상 이 영화의 진 주인공이라고 할만한 인물이다. 그가 범죄를 저지르는 데는 나름의 철학이 있는데 바로 ‘운’이다. 그는 운이라는 우연적 요소를 운명이라는 필연적 결과와 결부시킨다. 이것이 잘 드러난 장면이 바로 잡화점의 동전 던지기다. 안톤 쉬거는 잡화점 주인이 맘에 들지 않았고, 당장이라도 그를 해할 수 있지만, 그에게 동전 던지기를 시킴으로써 삶과 죽음을 결정하게 한다. 마치 자신의 자신의 행동에 운명이라는 정당성을 부여하려는 것처럼 보인다.

 

 

이 독특하고 소름 끼치는 악당은 재앙 그 자체를 의인화한 것으로 해석할 수 있다. 그가 저지르는 범죄는 예측할 수도 없고, 예방할 수도 없다. 마치 태풍 같은 천재지변 같다. 그 앞에서 인간은 그저 무력할 뿐이다. 안톤 쉬거가 타인을 전혀 이해하지 못하는 것처럼, 보통 사람도 안톤 쉬거를 절대 이해할 수 없다. 이해할 수 없음, 즉 ‘불가해’가 안톤 쉬거의 핵심이고, 또한 <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라는 제목이 나오게 된 이유다.

 

 

“요즘 범죄는 딱히 동기도 없다. 물론 두려운 건 아니다. 이 짓 하다가 뼈를 묻기로 각오했으니까. 다만 무모한 객기로 무의미한 범죄에 장단 맞추고 싶지 않을 뿐.”

 

현명한 보안관은 안톤 쉬거의 존재를 간파한다. 아니, 어쩌면 그 이전에 미쳐 돌아가는 세상을 보며 이미 파악하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노인이 가진 현명한 지혜로도 요즘 세상에 일어나는 범죄를 파악하기가 어렵다. 동기도 없고, 악의로 똘똘 뭉쳐 이해하고 싶어도 이해할 수 없는 끔찍한 일들이 벌어진다. 세상은 이토록 부조리로 가득한 곳이기에 ‘아무리 현명한 노인으로서도 이해할 수가 없다’는 게 이 영화의 주제인 셈이다.

 

 

이러한 메시지는 <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에만 나오는 게 아니다. 코엔 형제 작품 전반에 흐르는 메시지이기도 하다. 그들이 처음으로 국제적인 주목을 받게 된 걸작 <파고>도 똑같은 주제를 이야기하고 있다. 눈이 가득한 어느 시골 마을에 끔찍한 범죄가 벌어진다. 하지만 누구도 범인이 왜 그런 행동을 저질렀는지 이해하지 못한다. 심지어 관객도 마찬가지다. (이해할 수 없는 범죄를 2시간의 서술을 통해 이해하도록 만들었던 <기생충>과는 완전 다르다고 할 수 있다) 주인공이자 경찰 서장이었던 마지는 사건 당시 임신 중이었는데, 그런 사건을 보고 나면 다음과 같은 생각이 들 수밖에 없다. ‘과연 이런 세상에서 아이를 낳는 게 잘하는 일일까?’

 

코엔 형제는 이 외에도 여러 작품에서 예측대로 흘러가지 않는 인생의 부조리를 들추어내는데, 이를 가장 노골적으로 보여주는 작품이 바로 <시리어스 맨>이다. 이 영화의 모든 전개는 ‘우연’에 의해서 벌어진다. 인생이 꼬일 대로 꼬여가다가, 우연에 우연이 겹치면서 어찌어찌 일상으로 돌아오는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영화 말미에 엄청난 크기의 토네이도가 등장하면서 마무리된다. <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에서는 부조리와 재앙을 의인화하여 표현했다면, <시리어스 맨>은 그냥 직설적으로 재앙을 보여주는 셈이다.

 

 

코엔 형제의 작품을 통해 우리는 중요한 인생의 진리를 깨닫게 된다. 인생은 부조리하다는 점이다. 인생이 불공평하다거나, 운이 존재한다는 것보다 ‘부조리’라는 단어가 더 적확한 표현이라고 생각한다. 소설가 올더스 헉슬리의 말대로 “픽션의 문제점은 그게 너무 말이 된다는 점이다. 반면 현실은 결코 앞뒤가 맞지 않는다.” 그래서 픽션의 금기 중 하나가 우연의 남발이다. 그런데 코엔 형제는 우연을 남발하면서 인생의 부조리함을 꼬집는다. 정말 대단한 이야기꾼들이라고 생각한다.

 

결국, 노인을 위한 나라는 영원히 없는 셈이다. 지혜로 세상을 이해하려고 하지만, 세상은 그 지혜를 뛰어넘는 별의별 사건을 보여준다. 어쩌면 세상이 그렇게 돌아간다는 걸 깨닫는 것이야말로 진짜 지혜일지도 모른다. 부조리가 가득한 세상에서 우리는 어떤 자세를 가지고 살아야 할까? <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를 다시 보게 된다면 한 번쯤 생각해보는 것도 좋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