꾸준함의 끝판왕을 보여드리겠습니다

 

‘졸꾸’라는 말을 들어본 적 있는가? ‘졸꾸’는 ‘졸라 꾸준하게’의 줄임말로, 성공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졸꾸 정신이 필요하다고 한다. 비즈니스 세계는 복잡계로 이루어졌고, 성공을 위한 정답은 존재하지 않는다. 잘한다고 반드시 성공하는 것도 아니다. 실력보다 운이 더 크게 작용하는 경우도 많다. 그래서 졸꾸 정신이 필요하다. 운을 잡을 수 있는 유일한 수단이 꾸준함이기 때문이다.

 

 

이런 말을 하면 으레 돌아오는 대답이 있다. 그걸 누가 모르냐! 성실함과 꾸준함이 성공의 비결이라니, 너무 뻔한 소리 아니냐? 맞다. 새로울 것도 없고, 누구나 아는 이야기다. 그래서 신 박사가 졸꾸를 강조한 유튜브 영상의 제목도 <너무 뻔해서 어처구니가 없는 성공의 비밀>이었다. 하지만 그 뻔한 것을 제대로 해내는 사람은 별로 없다. 그럼 졸꾸를 제대로 보여주는 사람은 누가 있을까?

 

여기까지 생각이 미쳤을 때 영화 한 편이 떠올랐다. 30분짜리 단편 애니메이션으로 어릴 적 TV에서 본 작품이다. 나어릴 당시만 해도 애니메이션은 애들이나 보는 것이라는 분위기가 팽배했다. 하지만 이 작품이 주는 울림은 어른, 아이를 가리지 않는다. 오히려 어른이 되고 세상의 풍파를 경험하고 났을 때 더 큰 감동을 주는 작품이다. 그리고 마침내 졸꾸를 고민하기 시작했을 때 새로운 의미를 주는 작품이기도 하다. 바로 <나무를 심은 사람>이다.

 

20대 청년이었던 주인공은 사람들이 찾지 않는 알프스산맥을 따라 여행을 떠났다. 그곳의 풍경은 말할 수 없이 쓸쓸하고 황량했다. 풀이라고는 야생 라벤더가 전부고 나무 한 그루 보이지 않는 황무지가 끝없이 펼쳐져 있었다. 그곳에는 사람들이 떠나버린 유령마을이 존재했다. 청년은 마을에서 물을 구하고 싶었지만, 그곳에는 한 줄기 시냇물조차 보이지 않았다. 다른 마을의 사정도 별반 다르지 않았다. 주민들은 숯을 구워 생계를 유지했지만, 가난을 벗어날 수는 없었다. 성실한 사람도 끔찍한 현실 앞에 무너졌다. 악착같은 환경 속에서 서로 시샘하고 미워하기 바빴다.

 

물을 찾아 정처 없이 떠돌던 청년은 저 멀리서 나무 그루터기 같은 그림자를 발견했다. 양치기였다. 그에게 물을 얻어 마시고, 집에서 수프도 대접받았다. 그런데 식사를 마친 양치기가 이상한 일을 시작했다. 자루에서 도토리를 한가득 쏟아내더니 좋은 도토리를 골라냈다. 그깟 도토리로 무얼 하려고, 정성 들여 고르고 골랐던 걸까?

 

그 사정이 궁금한 청년은 양치기에게 하루 더 묵을 수 있냐고 허락을 받은 뒤, 양 치러 나가는 그의 뒤를 밟았다. 양치기는 초목에 양들을 풀어놓고는 봉우리 쪽으로 올라갔다. 목적지에 다다르자 그는 양치는 쇠막대기로 땅을 꾹꾹 찌르더니 구멍이 파이자 도토리를 넣고 다시 구멍을 메웠다. 그랬다. 그는 참나무를 심고 있었던 것이다.

 

양치기는 지난 3년간 아무도 살지 않는 황무지에 나무를 심어왔다고 했다. 10만 그루를 심었다고 했다. 그중에서 2만 그루가 싹을 틔웠지만, 절반은 다람쥐에게 갉아 먹히거나 척박한 환경에 잃게 될 거라고 했다. 그렇다면 앞으로 1만 그루의 참나무가 자라나게 될 것이었다. 그 황무지에서 말이다. 양치기의 이름은 엘제아르 부피에. 나이가 55세에 이른 노인이었다. 그는 나무가 없어서 땅이 죽어가는 거라며 딱히 할 일도 없어서 자신이 이 땅을 되살려보기로 결심했다고 말했다.

 

다음 날 청년은 양치기를 떠났다. 그리고 이듬해 1차 세계대전에 참여해 5년 동안 전장을 누볐다. 전쟁이 끝나고 사내는 다시 엘제아르 부피에를 찾았다. 그는 예전과 다름없었다. 양은 4마리밖에 안 남았지만, 대신 벌통을 치고 있었다. 양들이 어린나무에 피해를 줘 팔아버리고 대신 식물의 수분에 도움이 되는 벌을 기른 것이었다. 전쟁도 그를 막지는 못했다. 그는 조용히 나무만을 심어왔다.

 

노인이 심은 나무는 이미 사내보다도 크게 자라있었다. 아무런 기술이나 기계의 도움 없이 오직 양치기 노인의 영혼과 손에 의해 숲이 이뤄졌다. 마을을 거쳐 아래로 내려가자 물이 흐르고 있었다. 나무가 비와 눈이 내린 물을 머금었고, 마침내 생명의 젖줄이 흐르기 시작한 것이다. 사람들은 숲이 저절로 생겨났다고 생각했지만, 그 모든 일은 노인의 손끝에서 이루어진 것이었다. 그 누가 상상이나 했겠는가? 이토록 고집스럽게 선한 일을 하는 사람이 있을 거라고 말이다.

 

쳥년은 이후로 매년 엘제아르 부피에를 찾았다. 그가 나이를 먹어 중년의 사내가 될 때까지 엘제아르 부피에는 계속 나무를 심었다. 사내가 마지막으로 노인을 찾았을 때, 황무지였던 마을은 행복과 생명이 가득 찬 공간으로 변해 있었다. 모질게 불어대던 바람 대신 부드러운 산들바람이 불어왔다. 샘터에는 보리수가 심어있었고, 아이들의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대략 1만 명이 넘는 사람들이 엘제아르 부피에가 만든 숲에서 터를 잡고 살아가고 있었다. 오직 한 남자의 신념과 인내가 이뤄낸 결과였다.

 

엘제아르 부피에는 졸꾸의 화신이자 끝판왕 같은 사람이었다. 단지 꾸준히 나무를 심었기 때문에 그렇게 생각하는 게 아니다. <나무를 심은 사람>을 졸꾸의 관점에서 다시 보았을 때, 이전에 보지 못했던 디테일이 눈에 들어왔다. 그것은 누구나 쉽게 말할 수 있는 꾸준함 그 이상의 것이었고, 나아가 진정한 졸꾸를 이루기 위한 가르침이었다. 그것이 무엇인지 이 글을 통해 정리해보고자 한다.

 

첫째, 엘제아르 부피에는 성실했다. 너무 당연한 이야기처럼 들리는가? 하긴 게을러서는 절대 졸꾸를 이룰 수 없다. 그러나 이것이 미친 듯이 노오오오력하라는 말은 아니다. 그런 말을 하면 꼰대가 될 뿐이다. 엘제아르 부피에는 거대한 숲을 만들었지만, 이를 위해 하루에 16시간씩 매진한 것은 아니었다. 그는 먹고살기 위해 양 치는 일도 했고, 후에는 벌도 길렀다. 그렇게 일과를 마치고 나서 도토리를 골랐다. 그리고 양치는 사이사이 도토리를 심었다. 그가 나무를 심기 위해 쏟은 시간이 하루에 얼마나 될까? 도토리 고르는 시간은 파이프 담배를 다 태우는 시간 정도였다. 양치는 동안에 나무를 심었으니 따로 시간을 내지도 않았다. 아마 하루에 서너 시간은 넘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이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직장인이거나 학교에 다니는 사람이라면 알 것이다. 하루에 2시간만 짬을 내는 것도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내가 살을 빼야겠다고 생각한 게 아마 10년은 넘을 것이다. 하지만 하루 2시간 운동 시간을 마련하기가 쉽지 않았다. 정말로 시간이 부족한 시기도 있겠지만, 가장 큰 원인은 게으름이다. 내가 성실하게 하루 2시간씩 운동했다면 지금쯤 몸짱은 아니더라도 건강한 체형은 유지할 수 있었을 것이다. 고작 2시간이 노오오오력은 아니지 않나. 최소한의 시간만이라도 투자할 수 있는 성실함. 그것이 졸꾸의 시작인 셈이다.

 

둘째, 실패에 좌절하지 않았다. 주인공이 처음 엘제아르 부피에를 만났을 때, 그는 3년 동안 10만 개의 도토리를 심었다고 했다. 그중에 겨우 2만 그루가 싹을 틔웠고, 그중 절반은 제대로 자라지 못할 거라고 했다. 겨우 10%만 성공한 셈이다. 10개의 도토리 중 고작 하나만 살아남았다. 만약 내가 10개의 일을 시작했는데 전부 실패하고 하나만 성공했다면 어떤 생각이 들었을까? 불안하고 초조해서 금세 포기해버렸을지도 모른다. 포기하지 않더라도 마음이 흔들려서 이렇게 할까, 저렇게 할까 고민에 빠졌을지도 모른다.

 

게다가 나무라는 것은 빨리 자라지도 않는다. 1만 그루의 나무가 살아남았더라도 처음 모습은 초라하기 그지없었을 것이다. 겨우 정강이 정도 올라온 새싹이 쓸쓸한 황무지에 잡초처럼 흩어져 있지 않았을까? 그러나 엘제아르 부피에는 그런 결과에 좌절하지 않았다. 묵묵히 심고 또 심었다. 그 결과는 10년이 지난 후에야 드러났다. 사람보다 크게 자라서 덤불이 아니라 나무라고 생각될 정도가 될 때까지 걸린 시간이다. 어떻게 그는 좌절하지 않고 10년이나 기다릴 수 있었을까?

 

자신을 믿었기 때문이다. 꾸준하게 나무를 심으면 언젠가 커다란 나무가 되리라는 사실을 의심하지 않았다. 이런 마음가짐은 겉으로 드러나는 몸가짐에도 나타난다. 주인공은 처음 엘제아르 부피에를 보았을 때 자신감에 차 있는 사람이라고 느꼈다. 말 그대로다. 커다란 숲을 일궈낼 자신이 있었다. 믿음이 있었다. 혹시 환경이 더 척박하거나, 전쟁의 피해로 나무가 다 타버렸으면 어땠을까? 아마 그랬더라도 엘제아르 부피에는 좌절하지 않았을 것이다. 10만 그루를 심어서 안 된다면 20만, 30만 그루를 심을 사람이었다. 그는 자신이 하는 일을 굳게 믿었다. 졸꾸 그 자체였다.

 

셋째, 행동하는 사람이었다. 그것도 졸라 꾸준히! 영화에 등장하는 국회의원과 전문가들은 의논하고 고민하며 뭔가 조치를 취하고자 한다. 하지만 아무 일도 실행되지 않았다. 모두가 숲을 살려야 한다는 사실에 공감하면서도, 이를 위해 좋은 방안을 떠올리면서도, 행동에 나서진 않는다. 똑똑한 사람들이 말만 번지르르하게 늘어놓는 동안 엘제아르 부피에는 조용히 나무를 심었다.

 

똑똑하다는 사람은 이게 문제다. 최선의 방법을 찾느라 고민하느라고 막상 행동에 나서는 게 굼뜨다. 나도 그런 사람이었다. 주변에서 그런 칭찬을 많이 들었다. 아이디어가 뛰어나시네요. 생각이 기발하시네요. 나는 그런 칭찬이 대단한 것이라고 생각했다. 착각이었다. 생각만 뛰어나봤자 아무것도 이루어지지 않는다. 생각을 행동으로 옮겨야 한다. 그렇게 결과가 나와야 성공과 실패를 가늠할 수 있다. 생각만 하는 것은 실패하는 것보다도 못한 셈이다.

 

그렇다고 내가 행동을 전혀 안 하는 사람은 아니었다. 생각만 하지 말고 행동해야 한다는 사실은 알고 있었다. 그래서 언제나 결과물을 보여주고자 했다. 아이디어가 아니라 완성품까지 나와야 일을 해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게 전부가 아니었다.

 

결과물이 나오더라도 한두 개 가지고는 성공을 말할 수 없다. 물론 반짝인기는 얻을 수 있겠지만, 그것이 실력을 대변하지는 않는다. 진정한 성공은 꾸준한 결과물 뒤에 말할 수 있다. 1~2개월 잘 되는 게 아니라 1~2년 잘 되고 나서야 성공을 말할 수 있는 것이다. 이때 필요한 것이 졸꾸다. 그저 행동하는 것으로는 부족하다. 졸라 꾸준하게 행동할 수 있어야 한다.

 

특히 행동의 결과가 실패로 돌아갈 경우 졸꾸는 강력한 힘을 발휘한다. 첫 시도는 실패로 돌아갈 확률이 높다. 운이 좋아서 시작부터 잘 될 수도 있지만, 이건 정말 로또 맞을 확률에 가깝다. 아이디어를 짜내서 헉헉대며 결과물을 만들었는데 그게 실패로 돌아간다. 그래도 아이디어가 아까우니 한 번 더 시도해본다. 또 실패로 돌아간다. 이때 똑똑하다는 사람들은 다른 방법을 모색한다. 새로운 아이디어를 찾으려 한다. 그리고 또 몇 번의 도전을 마치고 눈을 돌린다. 그러는 사이 엘제아르 부피에 같은 사람은 묵묵히 방식을 고수한다. 진정한 성공과 실패를 가늠할 수 있을 때까지.

 

한 가지 방법을 무작정 끝까지 고수하라는 말이 아니다. 방법이 잘못되었다면 이를 수정하는 것은 매우 중요한 일이다. 문제점을 개선하기 위해 고민하는 과정은 성공을 위해 반드시 필요하다. 하지만 문제가 있을 때마다 하던 일을 완전히 접고 새롭게 시작할 필요는 없다. 무언가 도전하기 시작했다면 성공과 실패를 가늠할 수 있을 때까지 꾸준하게 행동해야 한다. 손바닥 뒤집듯이 일을 뒤엎는 게 아니라, 결과를 볼 때까지 인내할 줄 알아야 한다. 그렇다. 졸꾸 정신이 필요하다.

 

좋은 작품은 시대를 가리지 않는다. 그것은 개인의 시대도 마찬가지다. 어릴 적 <나무를 심은 사람>을 보았을 때는 환경 보호 메시지가 깊이 다가왔다. 아마 학교에서 자원 절약, 환경 보호 같은 이야기를 많이 들었기 때문일 것이다. 한창 취업에 실패하며 좌절하던 시절에는 엘제아르 부피에의 고독에 공감했다. 그가 나무를 심으면서 개인적인 슬픔을 치유하는 것처럼 느껴졌다. 그리고 졸꾸를 알고 난 뒤, 영화는 또 다른 모습으로 다가왔다. 거대한 숲을 이룬 기적 속에서 한 인간의 고귀함을 읽을 수 있었다.

 

기회가 있다면 <나무를 심은 사람>을 꼭 다시 보길 바란다. 이번에는 졸꾸의 관점에서 다시 보길 바란다. 그때 영화는 이전과 다른 새로운 이야기를 보여줄 것이다. 진정한 행복을 전해주는 졸꾸 정신이 무엇인지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