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악의 인간쓰레기를 주인공으로 내세운 이유는?

 

 

인간쓰레기를 필름에 담아내는 데 가장 탁월한 감독은 누구일까? 나는 단연코 마틴 스코세이지를 꼽는다.

 

거의 모든 영화에는 악당이 등장한다. 그들은 누가 봐도 흉악한 짓거리를 저지르는 인간쓰레기다. 더 잔인하고, 더 악랄하고, 더 지저분할수록 좋다. 그래야 주인공이 빛날 수 있으니까. 가끔은 악당이 주인공인 영화도 있다. 이럴 때면 애절한 과거가 등장한다. 그들이 악당이 될 수밖에 없는 사연을 구구절절 풀어 놓는다. 아무리 악당이라도 주인공이 인간쓰레기여선 안 되니까.

 

그런데 마틴 스코세이지는 악당을 주인공으로 내세우면서 조금의 실드도 치지 않는다. 그의 1990년 작 <좋은 친구들>이 대표적이다. 주인공 헨리는 3류 마피아다. 그는 온갖 추잡한 짓을 하고 다니며, 더 추잡한 2명의 친구와 함께, 추잡함의 끝을 향해 달린다. 막판에는 의리도 없이 그들을 밀고해 혼자만 잘 먹고 잘살고자 한다. 세상에 이렇게 ‘좋은 친구’가 또 있을까? 인간쓰레기라는 말이 너무도 잘 어울리는 상황이다. 마틴 스코세이지는 그런 인물을 주인공으로 내세웠다. 그리고 애절한 과거라든가, 어쩔 수 없는 상황 따위를 제공하지 않았다. 헨리가 인간쓰레기인 이유는 그가 그냥 인간쓰레기였기 때문이다.

 

<더 울프 오브 월스트리트>의 주인공 조던 벨포트도 마찬가지다. 그의 직업은 증권 중개인이다. 하지만 고객의 재산 따위에는 아무런 관심도 없다. 쓰레기 주식을 유망주로 속여 팔아치우고는 수수료를 챙겨 배를 불렸다. 나중에는 불법적인 일까지 손을 대 최악의 금융 사기꾼으로 거듭난다. 그러면서도 조금도 양심의 가책을 느끼지 않는다. 오로지 돈 버는 것만 생각한다.

 

그렇게 번 돈을 어떻게 썼을까? 우리 속담에 ‘개처럼 벌어서 정승처럼 쓴다’라는 말이 있다. 현실도 다르지 않다. 벌 때는 추잡하고 악독하게 벌었더라도 씀씀이가 올바르면 세상의 존경을 받기도 한다. 록펠러나 카네기가 그런 부류였다. 그러나 조던 벨포트는 씀씀이도 추악했다. 마약과 여자에 수억 원씩 쏟아붓고, 호화 주택과 거대 요트까지 장만하며 사치를 일삼았다. 그는 정말 인간쓰레기 그 자체였다.

 

<더 울프 오브 월스트리트>는 그런 쓰레기를 주인공으로 내세웠다. 그를 비판하는 이야기를 담아냈을까? 천만에. 영화가 도덕적 해이를 꼬집는 모습은 초반에 단 한 번 등장할 뿐이다.

 

“투자자들 따위 X 까라 그래. 중요한 건 돈을 투자자의 주머니에서 네 주머니로 옮기는 거야. 월스트리트의 첫 번째 규칙. 워렌 버핏이든 지미 버핏이든 누구든 간에 주가가 올라갈지 내려갈지 옆으로 굴러갈지 아무도 모른다는 거야. 증권 중개인들은 특히 더 모르지. 전부 가짜야. 요정가루 같은 거라고. 존재하질 않아. 지구상에 없는 요소란 말이지. 진짜가 아니라고. 투자자가 주식을 사서 값이 오르면 신이 나서 주식을 팔아 현금 챙겨 집에 가려고 하겠지? 하지만 우리가 그렇게 안 놔두지. 그러면 돈이 진짜가 되니까. 그럼 어떡하냐? 다른 기막힌 아이디어를 주는 거야. 특별한 아이디어, 또 다른 상황, 새로운 주식에 또 투자하게 만드는 거지. 계속 그렇게 반복하는 거야. 하고 또 하고 또 하고. 투자자가 부자가 되고 있다고 착각하는 동안, 서류상으로는 그렇겠지. 우리 같은 중개인들은 수수료로 진짜 현금을 챙긴다고!”

 

이후로 비판적인 논조는 등장하지 않는다. 금융계의 구조적 문제를 꼬집지도 않는다. 보여주는 것은 오직 조던 벨포트가 펼치는 사치와 향락뿐. 이토록 참신하게 돈을 낭비할 수 있다는 사실에 감탄할 정도였다. 그 모습을 씁쓸한 분위기로 연출하지도 않는다. 약에 절어 우스꽝스러운 모습을 보여주기도 했지만, 유쾌함에 가까웠지 딱히 비판적이라 보이지 않았다. 대부분은 화려함의 극치를 달리는 욕망의 뮤직비디오 그 자체였다.

 

결말도 마찬가지다. 조던 벨포트가 참회하는 모습 따윈 없다. 최후에는 수사 기관에 붙잡혀 감옥에 가기도 하지만, 그곳에서 딱히 고통받지도 않았다. 심지어 출소 후에는 세일즈 트레이너로 강연까지 다닌다. 수많은 청중이 반짝거리는 눈망울로 최악의 인간을 바라보더라. 조던 벨포트에게 인과응보란 없었다. 그를 구속한 수사관보다도 잘 나가고, 지금 이 글을 쓰는 나보다도 잘 나간다.

 

 

“아니 스코세이지 영감님! 도대체 무슨 이야기를 하고 싶으신 겁니까? 양심이라곤 눈곱만큼도 없는 인간쓰레기가 온갖 사치와 향락을 즐기다 끝내는 사람들의 존경을 받는다고요? 아무리 세상이 불공평하다지만, 그걸 굳이 영화로 만드셨어야 했나요?”

 

영화를 보고 나올 때 나는 혼란에 빠졌다. 마틴 스코세이지는 얼마나 쿨한 사람이길래 인간쓰레기를 이토록 화려하게 그려낸 걸까? 조던 벨포트가 이렇게나 나쁜 놈이라는 걸 보여주고 싶은 건가? 그렇게 생각하자니 피해자가 한 명도 등장하지 않았다. 조던 벨포트의 사기극 때문에 고통받는 사람을 보여줬다면 관객은 분노할 것이다. 한국 영화 <마스터>를 보라. 시작부터 사기 피해자를 등장시키고, 피해자를 구제하며 마무리한다. 그렇게 악당에게 분노하도록 이야기를 전개한다. 하지만 <더 울프 오브 월스트리트>에는 그런 장면이 존재하지 않았다. 초반 30분이 지나면 흥청망청 돈 쓰는 이야기밖에 안 나온다. 이를 부러울 정도로 화려하게 연출했다.

 

이 순간 뒤통수를 강하게 얻어맞은 기분이 들었다. 내가 지금 저 인간쓰레기를 부럽다고 생각한 건가? 남을 등쳐먹고, 마약에 절어 살며, 온갖 추태를 일삼은 작자를? 단지 부자라는 이유 하나만으로? 우리 모두 조던 벨포트가 쓰레기라는 사실을 알고 있다. 머리로는. 하지만 가슴으로도 그럴 수 있을까? 우리가 조던 벨포트처럼 부정한 기회를 맞이했을 때 이를 냉철하게 거절할 수 있을까? 영화를 보면서 단 한 번이라도 부럽다고 느낀 적이 있다면, 우리에게 조던 벨포트를 비난할 자격이 있을까? 어쩌면 스코세이지는 이런 생각을 하면서 영화를 찍었을지도 모른다.

 

“너희들은 다를 것 같지? 조던 벨포트는 지옥에서 올라온 악마이고 너희는 그와 다른 인간이라고 생각하지? 하지만 이렇게 거대한 욕망의 유혹 앞에서 너희가 인간으로 남을 수 있을까? 악마가 되지 않을 수 있을까?”

 

스코세이지는 영화 내내 이런 이야기를 노골적으로 드러낸 적이 단 한 컷도 없다. 오히려 최악의 금융사기를 부러울 정도로 화려하게 연출했다. 유쾌하고 발랄하게 그려냈다. 그러나 곱씹으면 곱씹을수록 흥이 나기 보다는 미간에 주름이 잡혀갔다. 스코세이지는 내면 깊숙한 곳의 추악한 욕망을 끌어내 보였다. 그런데 그 대상이 영화 속 인물이 아니다. 영화를 보는 관객의 내면이었다. 우리 모두 인간쓰레기가 될 수도 있다는 일침이었다. 속내가 까발린 듯한 부끄러움이 목 뒤로 벌겋게 올라오는 게 느껴졌다. 스코세이지 영감님은 쿨한 게 아니라 고약한 분이 아닐까 싶다.

 

보통 영화가 메시지를 노골적으로 강조하면 촌스럽다고 말한다. 이야기보다 메시지가 앞서면 그건 픽션이 아니라 칼럼이 된다. 그래서 실력 있는 이야기꾼은 메시지를 은은하게 보여준다. 이를 잘 감추면 감출수록 세련되었다고 말할 수 있다. 그런 면에서 <더 울프 오브 월스트리트>는 최고로 세련된 영화였다. 영화 내내 메시지를 드러낸 적이 없다. 관객을 훈계하지 않는다. 감상 중에는 질 낮은 코미디를 보는 것처럼 낄낄거리기 바쁘다. 그렇게 영화를 보고 극장 문을 나서는 순간 진짜가 시작된다. 관객을 혼란에 빠뜨리고, 고민하게 만들고, 마침내 자신을 돌아보게 한다. 인간’쓰레기’를 바라보며 ‘인간’쓰레기를 생각하게 한다. 마틴 스코세이지는 역시 거장 중의 거장이라고 말하고 싶다.

 

참고 : 영화 <더 울프 오브 월스트리트>, <좋은 친구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