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짜 위로가 되는 말의 2가지 핵심

사업이 망하고 빚더미에 올랐다가 3년 만에 빚을 청산한 이야기를 한 커뮤니티에서 보았다. 빚을 다 갚는 동안 얼마나 힘들었을지. 마음고생은 얼마나 심했을지. 그렇게 힘든 시절을 마치면서 전하는 말에 크게 느끼는 바가 있어 적고자 한다.

 

 

 

 

“누군가에게 고생했단 말 한마디만 듣고 싶어서 주절주절 적어봤습니다.”

 

나는 이 한 줄을 통해 진짜 위로가 무엇인지 느낄 수 있었다. 정말 인생 찐하게 살아온 사람만이 느낄 수 있는 그런 위로 말이다.

 

 

“잘 될 거야. 힘내.” 우리는 힘든 친구를 보면 이처럼 위로의 말을 전한다. 물론 잘 됐으면 하는 마음은 진심이다. 하지만 잘 될지 안 될지 누가 알겠는가? 솔직히 ‘잘 될 거야’라고 말하는 사람도 진짜 잘 될 거라고 생각하는 경우는 드물다. 근거도 논리도 없는 막연한 소리일 뿐이다. 만약 잘 될 수밖에 없는 이유를 근거와 논리를 가지고 말한다면? 잘 될 거라고 진짜 확신한다면? 이런 안목이 있는 사람이라면 위로를 하지 않는다. 베팅을 한다.

 

힘내라는 말도 비슷하다. 힘들어 죽을 것 같은 사람에게 힘내라고 하는 것만큼 부질없는 위로도 없다. 말만 들어서는 힘도 나지 않는다. 진짜로 힘을 주고 싶다면 고기라도 사 먹이는 게 낫다. 아니면 뭐라도 도와주거나. 당장 도와줄 수 있으면서도 그저 ‘힘내’라고만 말하는 친구를 보면 살짝 얄밉게 느껴질 때도 있다. 저게 진심인가 싶기도 하고…

 

이렇게 부질없는 위로를 나는 ‘가짜 위로’라고 생각한다. 말하는 사람도 믿지 않고, 듣는 사람도 힘 나지 않는, 허공에 떠다니는 말말말. 이런 말은 위로가 되지도 않고, 인간관계에 도움도 안 된다. 관계가 깊어지기는커녕, 오히려 얇아질 뿐이다. 이런 위로는 기억에도 남지 않는다. ‘언제 한 번 밥이나 먹자.’라는 말처럼 툭툭 털면 그대로 잊힌다. 그럼 어떤 위로가 진짜 위로일까?

 

 

첫 번째 핵심은 ‘경청’이다. 당사자가 아니면 그 상황이 얼마나 힘든지 아무도 모른다. 그래서 힘든 상황을 조금이라도 공감하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좋은 위로가 된다. 오히려 어설프게 조언하면 독이 될 확률이 높다. 그럴 바에는 한마디라도 더 들어주는 게 낫다. 좋은 위로는 듣기에서 시작한다.

 

두 번째 핵심은 ‘노력’이다. 칭찬의 경우 결과보다 노력에 주목하라고 한다. 결과를 칭찬하면 실패를 걱정하는 마음이 커지지만, 노력을 칭찬하면 실패를 두려워하지 않는다고 한다. 위로도 마찬가지다. 앞서 말했듯이 막연한 결과를 들먹여봤자 부질없는 일이다. 반면에 얼마나 힘들었는지, 얼마나 노력했는지 이해해주는 것만으로도 큰 위로가 될 수 있다. 그래서 나는 이렇게 위로하길 좋아한다.

 

“그동안 참 고생 많았어요.”

 

이것은 위로하는 사람뿐만 아니라 위로받는 사람에게도 중요한 의미가 있다. 결과가 어찌 됐든, 열심히 노력한 사람이라면 누구나 위로받을 자격이 있다. 그런 사람은 ‘잘 될 거야’라는 말보다 ‘고생했어’라는 말에 더 감동한다. 이 말을 듣는 순간 힘들었던 순간이 새록새록 떠오를 것이다. 반면에 본인이 생각해도 노력을 다하지 않았다고 여기면 결과에 요행을 바라게 된다. ‘고생했어’보다는 ‘잘 될 거야’라는 말을 기대한다. 부질없는 소리라는 걸 알면서도 말이다.

 

 

2010년에 개봉한 <내 깡패 같은 애인>이라는 영화가 있다. 제목만 보면 흔한 조폭 영화 같지만, 사실은 취준생의 애환을 그린 작품이다. 왜 이런 작품을 찍게 되었냐고 물었을 때, 감독이 이렇게 대답했다고 한다.

 

“‘여기까지 오시느라고 정말 고생 많았습니다.'(영화 속 대사) 이 말을 해주고 싶었어요.”

 

아마 본인도 감독의 자리에 오를 때까지 정말 고생이 많았을 것이다. 그렇게 노력의 아픔을 알기 때문에 진짜 위로를 전할 수 있지 않았을까? 한 번쯤 생각해볼 일이다. 나는 지금까지 ‘진짜 위로’를 전해왔을까? 그리고 ‘진짜 위로’를 전할 만큼 찐하게 살아왔을까? 이제부터라도 우리 서로 진짜 위로를 주고받도록 하자.

 

참고 <드디어 빚 청산 했습니다>, 보배드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