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제영화제 25관왕? 도대체 어떤 영화길래? (feat. 박찬욱 감독 극찬)

※ 이 글에는 영화 <벌새>의 스포일러가 (조금) 포함되어 있습니다.

 

 

<벌새>는 개봉 전부터 화제에 올랐다. 베를린영화제, 시애틀국제영화제, 부산국제영화제… 국내외를 막론하고 권위 있는 국제 영화제에서 상을 쓸어 담았다. 무려 25관왕. 여기에 박찬욱 감독의 극찬까지 더해졌다. “감독에게 강력히 요구한다. 서둘러 속편을 내놓으라.” 박찬욱 외에도 린 램지, 제인 캠피온 등 명망 있는 감독들이 <벌새>를 호평했다. 아직 영화는 관객과 만나기도 전인데 말이다. 무엇이 이들로부터 찬란한 호평을 끌어낸 걸까? 그 궁금증에 영화를 직접 관람했고, 다 보고 나니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1. 기름기 쫙 뺀 <응답하라 1994>

 

 

영화의 배경은 1994년이다. 자막으로 등장하는 연도에 별다른 감흥은 없었다. 그러나 이어지는 영상에서 시대에 압도당했다. 장소, 배경, 의상, 소품까지 영화의 모든 미장센이 1994년을 담고 있었다. 90년대에 흔하게 보던 복도식 아파트. 곳곳에 페인트가 벗겨진 익숙한 모습. 명백하게 요즘 트렌드와 다른 교복 스타일. X세대, 오렌지족으로 대표되던 특유의 강남 패션. 그리고 나조차도 써본 적 없는 추억의 삐삐까지. 잘 담아낸 정도가 아니다. 관객을 1994년의 한복판에 던져 놓는다. 그 시절의 공기가 느껴질 정도였다.

 

단순히 배경과 소품이 전부가 아니다. 그 시대 사람들의 감성까지 담아내고 있다. 25년 전의 대한민국은 지금과 분명 달랐다. 확실히 투박하고 또한 순박했다. 어른들은 아이들을 존중하지 않았다. 폭력의 사용도 지금보다 잦았다. 물리적인 폭력만이 아니다. 담임 선생님이 반 아이들에게 쪽지를 나눠주며 ‘날라리 2명’을 적어 내라고 하는 장면이 나온다. 요즘처럼 왕따 문제가 심각한 시절에 그런 짓을 했다간 난리가 났을 거다. 하지만 1994년의 담임 선생님은 그런 걸 신경 쓸 정도로 세심하지 못했다. 그 정도로 투박한 시절이었다.

 

그렇다고 억압과 폭력만이 지배하는 시절로 그리지도 않는다. 90년대는 X세대로 대표되는 새로운 문화가 중흥하던 시기였다. 그 낭만을 영화는 놓치지 않는다. 적절한 삽입곡이 등장하며 그때를 추억하게 한다. 주인공 은희가 남자친구와 만날 때 흘러나오는 <칵테일 사랑>이 아련한 감성을 자극한다.

 

<벌새>는 <응답하라 시리즈>와 비슷한 감성을 가졌다. 하지만 빛과 어둠을 모두 담았다. 마냥 그리운 것도 아니고, 마냥 끔찍한 것도 아니다. 기름기 쫙 뺀 현실적인 <응답하라 1994> 같았다. 부조리와 낭만이 공존하는 시절. 아마도 그게 모두가 추억하는 과거가 아닐까?

 

 

 

 

2. 시대를 담아낸 성장 영화

 

 

<벌새>의 주인공은 중학교 2학년 소녀 ‘은희’다. 은희는 가부장적인 가정환경 속에서 괴로워하면서도, 때로는 반항하고, 때로는 일탈하며 자신을 드러내고자 한다. 여기에 친구와의 우정과 반목, 남자친구와의 이별과 재회, 그리고 기꺼이 존경할 수 있는 멘토와의 만남. 1994년은 은희에게 격정의 시기였다. 촌스러운 표현이지만, 질풍노도의 시기라는 말이 어색하지 않다.

 

무엇이 은희를 고민과 혼란에 빠뜨렸을까? 여기에서 1994년이라는 시대적 배경이 중요하게 작동한다. 앞서 말했듯이 그 시절은 지금보다 투박했다. 때로는 야만적이라고 느껴질 정도다. 급격한 경제 성장으로 외형은 커졌지만, 내면의 문화적 성숙이 이뤄지지 못한 고도성장의 끝자락이 그대로 느껴진다. 은희는 ‘이건 아닌데…’ 싶은 일들이 벌어지는 걸 목격하면서도, 딱히 어찌할 수 없다. 사회라는 이름의 억압 속에서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끊임없이 고민할 뿐이다.

 

그런 은희에게 정신적 멘토가 되어준 존재가 있다. 한자 학원의 김영지 선생님이다. 그녀는 친구와의 관계 때문에 고민하는 은희를 위로한다. 정답을 말해주기보다는, 올바르게 고민하도록 도와주는 길잡이 역할을 한다. 그런 영지 선생님이 은희에게 던졌던 대사가 내 가슴에 박혔다.

 

“(세상에는) 말도 안 되는 일이 참 많아. 그렇지?”

 

말도 안 되는 일, 다른 말로 하자면 ‘부조리’라고 할 수 있다. 세상은 부조리 천지다. 이해할 수 없는 일 투성이다. 왜 이런 일이 생기는지 고민해도 답이 나오지 않는 경우가 많다. 잘못되었다는 걸 알면서도 일단은 수긍해야 할 때도 있다. 그러면서도 언젠가는 바꾸고 말겠다는 의지를 잃어서는 안 된다. 그렇게 부조리가 무엇인지 알아가는 것. 그게 바로 성장이 아닐까?

 

영화는 막바지에 이르러 1994년 10월 21일의 비극을 보여준다. 성수대교 붕괴 사고.

 

“어떻게 다리가 무너지니? 그렇게 큰 다리가 어떻게 무너지니?”

 

사고로 딸을 잃은 어느 어머니가 한 대사다. 지금 생각해도 어이가 없는 사고였다. 그 커다란 다리가 무너졌다. 말도 안 되는 일이다. 그 부조리로 상실의 아픔을 겪는다. 그 사건으로 우리는 무엇을 잃었을까? 또 무엇을 배웠을까? 영화는 은희라는 중학교 2학년 소녀의 시점에서 진행하지만, 영화를 보는 누구라도 자신을 돌아보도록 만드는 지점이었다. 소녀의 성장을 통해 관객의 성장을 돌아보게 한다. 그리고 시대의 모습을 바라보게 한다.

 

이 지점에서 왜 이 영화가 전 세계적인 호평을 받았는지 이해할 수 있었다. 인기 있는 작품은 많은 사람을 감동시킨다. 좋은 작품은 그 와중에도 올바른 가치를 벗어나지 않으며, 누군가를 차별하여 상처 주지 않는다. 위대한 작품은 이것을 국가나 시대 단위로 해낸다. <벌새>는 소녀의 성장을 통해 시대의 모습을 담았다. 안타깝게도 25년이 지난 지금이 그때보다 더 성숙했는지는 의문이다. 물론 과거처럼 투박하진 않다. 하지만 세련된 모습으로 억압은 이어지고, 시대적 비극은 여전히 발생하고 있다. 이 점을 깨닫게 해주었다는 것. 이것만으로도 <벌새>는 충분히 훌륭한 영화라고 생각한다.

 

 

 

3. 남에게 상처 주는 사람일수록 내면은 나약하다

 

 

거시적인 시대적 담론만큼, 은희 개인의 미시적 담론도 영화의 중요한 요소로 등장한다. 바로 은희가 마주치는 모든 인간관계다. 은희의 집안은 화목해 보이지 않는다. 가부장적인 아버지와 이를 그대로 물려받은 오빠의 폭력 속에서 은희는 괴로워한다. 위기의 순간에 친구는 은희를 팔아먹기도 하고, 남자친구는 바람을 피우기도 하고, 용서를 구하기도 하는 등 우유부단한 모습을 보인다.

 

열 길 물속은 알아도 한 길 사람 속은 모른다고 했던가. 영화를 보면서 주변 사람들의 이해할 수 없는, 아니 용납할 수 없는 행동을 보면서 은희의 고통에 공감할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영화는 그런 사람들을 ‘악인’으로 그리지 않는다. 가부장적인 아버지는 누구보다도 연약한 존재였다. 그가 보여주는 공격성이 연약한 내면을 감추려는 몸부림이었다는 걸 은희는 어렴풋이 눈치챈다. 친구가 배신한 이유는 폭력이 두려웠기 때문이었고, 남자친구는 은희보다 더 억압적인 가정환경을 가진 아이였다. 그들의 나약한 내면을 살펴볼 줄 알게 되었다는 것. 이것이 은희가 성장했다는 증거가 아닐까? 그 빛과 어둠을 모두 볼 수 있게 되자, 영화 속 대사가 뇌리에 강하게 새겨졌다.

 

“다만 나쁜 일들이 닥치면서도 기쁜 일들이 함께한다는 것. 우리는 늘 누군가를 만나 무언가를 나눈다는 것. 세상은 참 신기하고 아름답다.”

 

다양한 인간관계 중에서 가장 인상적인 것은 바로 어머니와의 관계였다. 아파트 단지 입구에서 어머니를 발견하자 은희가 외쳤다. “엄마!” 하지만 어머니는 그 소리를 듣지 못한다. “엄마! 엄마!” 아무리 애타게 불러도 대답이 없다. 대신 어머니는 물끄러미 허공을 응시한다. 문득 우울증 초기 증상과 비슷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무지막지한 경제 성장의 끝자락에서 개인의 행복은 제쳐두고 오로지 가족과 먹고사니즘만 생각하며 살아온 분. 당시 한국 사회에서 ‘엄마’라는 존재는 슈퍼맨과 같았다. 그렇게 여자도 아닌, 자신도 아닌, ‘엄마’가 되었다. 그 내면의 고통을 조금이나마 이해할 수 있게 되었다는 것. 그리고 ‘은희의 엄마’를 통해 ‘우리의 엄마’를 돌아보게 만든다는 것. <벌새>는 정말 다양한 지점에서 나를 감탄하게 했다. 이 글을 쓰며 생각해보니, 어쩌면 중학생 은희가 지금의 나보다도 성숙한 것 같다. 나는 그처럼 타인의 속내를 읽어낼 줄 모르기 때문이다. 심지어 우리 엄마도. 나는 한 번이라도 엄마의 고통을 헤아려 본 적이 있을까?

 

영화를 보고 칭찬 일색의 글을 쓰게 되었지만, 이 영화를 누구에게나 추천하기에는 걱정스러운 부분이 있다. 안타깝게도 오락적인 측면을 기대하기는 어려운 작품이다. 영화가 무작정 무거운 것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응답하라 시리즈>처럼 가볍고 발랄한 것도 아니다. 여기에 전통적인 서사 구조를 따르지도 않는다. 위기-절정-결말로 이어지는 클라이맥스가 존재하지 않는다. 여러 갈등이 등장하지만, 이를 속 시원히 해소하지 않고, 의문과 고민만 남기고 지나가는 경우도 있다. ‘은희의 이야기’가 아니라 ‘은희의 삶’을 담아낸 기분이다. 극적인 이야기에서 오는 재미를 찾기 어렵다는 말이다.

 

하지만 1994년을 보낸 사람이라면 누구나 한번 쯤 봤으면 한다. 그 시절 나는 어떻게 성장했고, 무엇을 잃었고, 무엇을 얻었는지, 각자의 1994를 떠올리는 작품이 될 것이다. 그 끝에서 오늘의 나는 어떻게 살아갈 것인지 고민해 볼 수 있을 것이다. 아주 보편적이면서 동시에 가장 찬란했던 시절의 이야기. <벌새>를 강력히 추천한다.

 

참고(사진자료) <벌새 스틸 컷>, 네이버 영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