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생을 살다 보면 한계에 부딪힌다. 목표를 향해 나아가다 시련에 좌절하고 목표가 가까워지는 순간 건강이 걸림돌이 되어 포기한다. 내 의지대로 되지 않는 현실이 야속하게 느껴진다. 철학자 니체는 현실을 바꿀 수 없다면 익숙해져야 한다고 말한다. 그는 예민한 눈을 보호하기 위해 뿌옇게 만든 안경을 쓰고 다녔으며 극심한 두통, 구토, 어지럼증에 평생 시달렸다.
그러나 니체는 신체적 한계와 암울한 진단에 낙담하지 않았다. 오히려 모든 순간을 적극적으로 임했다. 특히 배움에 대한 욕구가 누구보다 뛰어났다.
내 병은 내 모든 습관을 완전히 바꿀 권리를 주었다.
그의 나쁜 시력은 내적으로 그를 훨씬 더 집중하게 했다. 자료를 선택하고 그것을 전달하는 과정이 꾸준히 반복될수록, 말하기 실력은 더 명확하고 유창해졌으며 집중력도 높아졌다.
“내 병은 내가 망각하기를 허용했고, 요구했다. 그것은 나에게 내린 최고의 축복이었다. 제일 밑바닥에 있던 나 자신, 끊임없이 다른 자아의 목소리를 듣느라 침묵을 강요당했던 나 자신이 수줍어하며의심에 가득 찬 눈으로 서서히 깨어났다. 그리고 마침내 다시 말하기 시작했다.”
니체는 한계를 장점으로 삼았다. 건강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쓰게 된 짧고 강렬한 방식의 문체 덕분에 단점이 장점으로 승화되었다. 그는 이런 방식의 글쓰기를 통해 한층 더 심도 있는 질문을 자극할 수 있음을 깨달았다. 신체적 결함은 평범한 청년이던 그를 독창적인 문장가이자 진정한 사상가로 만들었다.
오히려 인간은 자기 자신을 알게 되고 자기 자신이 되려면 운명을 받아들여야 한다.
그의 눈은 바깥세상보다는 내면을 향하는 것 같았다. 반은 장님이나 다름없었지만, 위축된 모습도, 세상을 감시하는 듯한 모습도 없었다. 무엇보다 그의 눈은 그를 은밀한 비밀을 지키는 수호자처럼 보이게 했다.
“만약 삶이 과거에서 미래로 이어지는 긴 선이고, 인간이 이 선의 어느 한 지점에 있다면, 그가 거기 있는 것은 자신의 책임이다. 따라서 이성이 있는 인간은 언제까지 반복될지 모를 시간의 수레바퀴 속에서 행복하도록 이 순간을 받아들여야만 한다.”
니체는 모든 신이 죽었음을 선포했다. 우리는 위버멘쉬를 원하며 인간은 극복되어야 할 어떤 존재라고 말했다. 위버맨쉬는 잔인하고 처참해 보이는 현실이 영원한 존재가 죄인을 벌하려고 보내는 벌이 아님을 안다. 삶은 신성한 우연을 위해 춤추는 무도회장이며 그 무도회장에서 일어나는 신성한 우연에서 보이는 긍정의 반응을 통해 의미를 찾는다.
나를 죽이지 못하는 것은 나를 더 강하게 만든다.
위버멘쉬는 회의론과 허무주의에 굴복하지 않는다. 종교에서 벗어난 자유로 자신의 삶을 더 강하게 만든다. 위험을 바로잡는 법을 알고, 불행을 장점으로 이용하는 법을 알며, 잊는 법을 안다. 모든 것이 자신에게 최선이 될 만큼 강하고, 자신을 죽이지 못하는 것은 무엇이든 자신을 더 강하게 만든다. 그는 인생의 불확실성과 무상함에서 즐거움을 느끼며 자유를 얻는다. 그는 생각의 진화를 가져오는 새로운 새벽을 언제나 환영한다.
자신의 삶에 이유가 있다면 어떤 방법도 거의 받아들일 수 있다.
계획과 상관없이, 의지와 상관없이 인생의 풍파를 겪을 때 상황을 통제하기보다 먼저 자신부터 통제해야 한다. 자기 자신을 통제한 사람은 ‘아마도’라는 다양한 시각이 존재하는 불확실성을 견딜 수 있다. 확실성을 버릴 용기가 있다면, ‘결과’나 ‘결론’에 관한 생각은 그 어떤 것도 쓸모가 없다. 우리의 삶은 법칙의 목록이 아니다. ‘만약에?’라는 음악에 맞춰서 출 수 있는 춤이다.
누구도 너를 대신해, 인생의 강을 건너게 할 다리를 만들어주지 않는다. 오직 너 혼자 이뤄내야 한다.
회의적으로 인생을 바라보고, 허상과도 같은 희망을 의지하지 않아야 한다. 삶 그 자체에서 의미를 찾으며 타인과 비교하거나 갈등을 일으키고 싶은 충동과 맞서 싸워야 한다. 만약 죽음 이후 아무것도 없다면, 모든 것의 궁극적 의미는 바로 ‘지금 여기’에 있다. 주체적으로 살고 싶다면, 자신의 모든 행동에 책임을 져야 한다.
현실에 안주하지 않아야 한다. 인생에 답이 있다면 그 답은 우리 스스로 찾아야 하고, 의미가 있다면 그 의미도 우리가 직접 찾아야 한다. 그것이 니체가 강조한 ‘위버멘쉬’를 이뤄내는 진정한 길이다.
어떤 것이 불합리하다는 것은 그것을 반론할 일이 아니라 오히려 존재해야 할 이유이다.
인간은 무엇보다 자기 자신이 되어야 한다. 그리고 자신의 운명을 사랑해야 한다. 우리는 삶이 우리에게 가져다주는 것을 받아들이고, 자기혐오와 원한, 증오, 질투가 뒤섞여 되풀이되는 어리석은 상태에 빠지지 않아야 한다. 그러고 나면 인간은 마침내 자기 자신을 극복하고 자기 자신과 평화를 이룬 위버맨쉬로서 진정한 성취감을 찾을 수 있다.
이 세상의 목적에서 즐거움을 찾고, 존재만으로도 장엄함을 느끼며, 삶의 유한함을 기쁘게 받아들일 수 있다.
참고: 《니체의 삶》