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진왜란 초반 조선군은 일본군에게 처참하게 당했다. 일본군은 수도 한양까지 파죽지세로 북상했고, 선조 임금은 궁궐을 버리고 북쪽으로 피신해야만 했다. (적장을 베러 왔는데, 적장이 없어서 일본군이 당황했다는 얘기도 전해진다)
많은 이들이 초반 결정적 패인을 신립 장군이 지휘한 탄금대 전투라고 지목한다. 지금이야 우리는 이순신 장군을 최고의 명장으로 꼽지만, 당시에 최고 명장은 신립이었다. 그는 여진족을 토벌한 북방의 맹장이었고, 온 백성의 신뢰와 기대를 받는 사람이었다.
하지만 그는 방어에 유리한 산악 지형인 조령(문경새재)을 버리고 탄금대 일대의 평지에서 전투를 벌였다. 신립이 바보라서 이런 선택을 한 건 아니다. 그가 거느린 병사는 대부분 기병이어서, 이들이 자유롭게 활동할 수 있는 평지를 전쟁터로 고른 것이다. 게다가 조령 외에도 추풍령과 이화령 등 한양으로 가는 우회로가 많이 존재했기에, 조령에서 수비만 하다가는 오히려 일본군에 협공을 당할 가능성도 높았다.
하지만 당시 일본에는 이미 서양에서 시작된 군사 혁명이 전파되어있었다. 일본의 주력 부대는 조총과 이동식 대포로 무장한 화약 무기로 무장하고 있었고, 여기에 기병을 무력화할 다양한 수단(참호와 울타리)도 개발해 놓은 상태였다. 평지에서 기병이 유리할 거라는 기존 인식이 더는 통하지 않는 상대였던 셈이다.
그런데 여기서 한 가지 궁금한 점이 있다. 임진왜란 당시 일본군은 프랑스군보다도 많은 조총을 보유했다고 알려졌다. 일본군은 어떻게 그 많은 조총을 습득하게 되었을까?
당시 동아시아에도 총기는 있었지만, 실전에서 기병을 상대하기에는 성능이 턱없이 부족했다. 반면 유럽의 총기는 3가지 혁신을 이뤄냈다. 첫째, 개머리판을 달아 정확한 조준이 가능했다. 둘째, 불을 붙이는 화탄을 불심지나 금속으로 대체하여 불씨를 오래 유지했다. 셋째, 방아쇠를 점화 장치에 부착해 두 손으로 총을 잡고 눈을 떼지 않은 채 목표물을 겨냥할 수 있게 했다. 일본은 이처럼 발달한 무기를 보유했고, 그 덕에 전쟁 초반 승기를 잡을 수 있었다.
그럼 또 다른 궁금증이 생긴다. 일본은 무슨 돈이 있어서 그 많은 조총을 구할 수 있었을까?
당시 서양(포르투갈) 상인들이 일본산 제품 중에서 관심을 가진 것은 오로지 은이었다. 일본은 은광석이 풍부했지만, 제련 기술이 부족해 은을 많이 생산하지 못하다가 16세기 중반 연은분리법(납이 포함된 은광석에서 순수한 은만을 골라내는 기술)을 습득하면서 세계적인 은 생산 국가로 부상했다. 당시 세계에서 유통되던 은의 30%가량이 일본에서 나왔다고 한다.
아이러니하게도 일본에 연은분리법을 전파한 나라가 바로 조선이었다. 조선왕조실록에는 이미 연산군(재위 기간 1494~1506년) 때 김감불과 김검동 등이 연은분리법을 개발해 왕에게 아뢰었다는 기록이 남아 있다. 당시 국제 사회에서 은의 수요가 늘어나고 있었기에, 연산군이 연은분리법에 관심을 보이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이후 조선에는 대대적인 은광 개발 붐이 일었다.
그런데 연산군은 조선 왕조 최악의 폭군이었고, 그를 왕위에서 몰아내는 중종반정이 일어난다. 이후 ‘폐정개혁’이라는 구호 아래 연산군 때 벌어진 일을 모두 일소하는 상황이 이어졌다. 여기에 조선의 근본은 농업이라는 주장 아래 은광 개발을 축소해야 한다는 목소리도 나왔다.
상황이 이렇게 되자 은 생산 기술자들은 살길을 모색하지 않을 수 없었고, 일본으로 연은분리법이 유출되는 일이 발생하기에 이른다. 그렇게 연은분리법을 습득한 일본은 엄청난 은 생산량을 통해 서양식 화약 무기를 대량으로 수입하게 되었고, 임진왜란을 일으킬 수 있는 군사력을 모을 수 있었다.
그래서 임진왜란을 단순히 ‘임진년에 왜가 일으킨 난리’라고 보면 안 된다고 한다. 당시 동아시아를 지배하던 중국의 국제 질서에 무역을 바탕으로 한 해양세력 일본이 도전한 국제전쟁이라는 해석이다. 하지만 조선은 그런 국제 정세에 끼어들 틈이 없었다. 은을 중심으로 하는 국제 교역망에서 고립되어, 신무기를 비롯한 군사 혁명을 도입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조총이 군사 혁명의 상징이었다면, 은은 당시 전 세계로 뻗어 나가는 교역망의 상징이었다. 즉, 임진왜란은 군사 혁명과 경제 혁명이 합작한 국제 전쟁이었다. 그리고 그 뿌리에는 역시나 돈의 흐름이 자리 잡고 있었다. 세계를 뒤흔든 사건 이면에는 언제나 ‘돈’이 있었고, 따라서 돈의 흐름을 이해하면 세계의 흐름을 볼 수 있다.
만약 조선이 은광 개발의 중요성을 깨닫고 일본에 버금가는 은 생산량을 보여주었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역사에 만약은 없다. 하지만 역사로부터 배울 순 있다. 특히 요즘처럼 경제가 중요한 시대에는 돈의 역사를 배워야 할 필요성이 더욱더 높아지고 있다. 세계를 뒤흔드는 힘의 흐름을 읽어내고 싶다면, 지금 당장 돈의 역사를 공부해보길 바란다.
돈에서 역사를 배우고, 역사에서 돈을 배우는
국내 최고 이코노미스트 홍춘욱 박사의 대중 교양서
참고
1) 책 <돈의 역사 2>
2) 역사저널 그날, KB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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