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연은 얼마나 내 삶을 지배하는가

 

막장 드라마의 단골 요소가 무엇일까? 바로 기억상실증이다. 결정적인 순간에 주인공이 교통사고를 당한다. 사고만 당해도 어이가 없는데 꼭 기억상실증에 빠진다. 이 사건을 계기로 남녀주인공이 화해한다. 과거의 문제가 해결되지 않았지만, 어쨌든 모두 용서한다. 그리고 뜻하지 않은 행운이 찾아오며 해피엔딩을 맞는다. 이런 작품을 보면 재미는 둘째 치고라도 한 소리 나올 수밖에 없다.

 

“작가가 시나리오를 속 편하게 쓰는구만.”

 

그에 반해 명작이라 불리는 작품은 탄탄한 전개를 보여준다. 한 사건이 다른 사건을 불러오고, 또 그것이 원인이 되어 또 다른 갈등을 불러온다. 그렇게 작품 전체가 유기적으로 맞물리며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야기가 흘러간다. 플롯의 날실과 씨실이 촘촘하게 엮여 있어 물 샐 틈조차 보이지 않는다.

 

그런데 잘 짜인 이야기가 과연 현실을 반영한다고 볼 수 있을까? <멋진 신세계>로 유명한 올더스 헉슬리는 이런 말을 남겼다.

 

“픽션의 문제점은 그게 너무 말이 된다는 점이다. 반면 현실은 결코 앞뒤가 맞지 않는다.”

 

날카로운 지적이다. 우리는 앞뒤가 맞는 픽션을 잘 썼다고 한다. 우연을 남발하면 망작이라 부른다. 하지만 현실은 생각보다 많은 우연으로 이루어졌다. 올더스 헉슬리는 그 점을 지적했다. 픽션을 넘어 인생을 돌아보게 하는 명언인 셈이다.

 

그럼 영화에서도 우연을 다룰 수 있을까? 단지 이야기의 속 편한 전개를 위해 우연을 남발하는 것과는 다르다. 우연을 통해 삶의 부조리와 이해할 수 없음을 풀어내며 인생의 진실을 포착하는 그런 작품이어야 한다. 다행히 그런 작품이 존재한다. 바로 코엔 형제가 감독한 <시리어스 맨>이다.

 

 

<시리어스 맨>의 주인공 래리 고프닉은 물리학 교수로 종신 재직권 취득을 앞두고 있었다. 하지만 그의 앞에 뜻하지 않은 고난이 닥친다. 비는 한 번 오면 쏟아진다고 했던가? 주인공이 겪은 고난을 열거하면 다음과 같다.

 

1. 한 학생이 사무실을 찾아와 F라는 성적이 부당하다고 항의한다. 래리는 학생을 좋은 말로 타일러 돌려보내는데, 돌아와 보니 책상에 못 보던 돈 봉투가 놓여 있었다. 학생이 성적을 조작해달라며 뇌물을 두고 간 것이다. 래리는 후에 학생을 불러 화를 내지만, 학생은 돈을 두고 간 적이 없다고 발뺌한다. 나중에 학생의 아버지가 찾아와 아들의 성적을 올려달라고 한다. 만약 래리가 뇌물죄로 아들을 고소하면 자신도 명예 훼손으로 고소하겠다고 으름장을 놓는다. 래리는 이도 저도 할 수 없는 난감한 상황에 빠진다.

 

2. 래리의 아내는 싸이 에이블먼이라는 남자와 사랑에 빠졌다. 그리고 당당하게 이혼을 요구한다. 래리는 아무 잘못도 하지 않았는데 무슨 소리냐며 항변하지만, 이미 아내의 마음은 떠난 지 오래였다. 심지어 별거를 위해 래리를 집에서 쫓아내기까지 한다. 하지만 이혼은 이루어지지 않았다. 아내의 애인이 교통사고로 죽어버린 것. 래리는 이혼 소송 비용을 지불하는 대신, 죽은 아내의 애인을 위한 장례식 비용을 지불하게 된다.

 

3. 래리의 동생은 사회성에 문제가 있어 직장도 없이 살아가는 잉여 인간이다. 래리에게 얹혀사는 것도 모자라 도박과 미성년자 성추행 혐의까지 받으며 래리를 괴롭힌다. 결국, 래리는 동생의 변호사 비용 때문에 학생의 성적을 올려주고 만다.

 
영화는 주인공의 고난을 담담하게 그려낸다. 그 담담함이 역설적으로 유머러스하게 작동하며 독특한 코미디 영화를 완성한다. 그런데 마냥 피식거리고 넘어갈 수가 없다. 그 모든 고난이 실제로 일어날 수도 있는 일이기 때문이다.

 

특히 아내와의 이혼 문제가 백미였다. 아내는 어느 날 갑자기 이혼을 요구한다. 뜬금없이 생각하는 래리만큼, 영화를 보는 관객도 황당하게 느껴지는 전개였다. 이전에 어떠한 전조도 보여주지 않는다. 아내가 퉁명스럽게 말한다거나, 둘 사이에 갈등이 있다거나, 이런 ‘복선’을 깔아놓지 않았다. 정말 깜빡이도 없이 훅 들어오는 전개였다. 이후에 아내와 아내의 애인이 보여주는 적반하장도 기가 막히다. 하지만 백미 중의 백미는 이혼 사태의 결말이었다.

 

아내의 애인이 어느 날 갑자기 죽어버렸다. 교통사고라고 하는데 어떤 일이 있었는지 보여주지도 않는다. 그저 교통사고를 당해 죽었다는 결과만 알려준다. 이 무슨 황당한 일일까? 꼬이고 꼬여도 이렇게 꼬일 수 있을까? 래리는 죽은 아내의 남자친구 장례식을 치뤄준다. 생각해보면 굳이 그럴 필요는 없어 보인다. 하지만 가정이 파탄나는 지경을 생각하면 그깟 장례식 쯤 치뤄질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든다.

 

이렇게 이야기를 풀어놓고 보니 살짝 생각이 흔들린다. 이런 기막힌 우연이 실제로 일어날 수 있을까? 하지만 아내가 이혼을 요구할 수도 있고, 아내의 남자친구가 사고로 죽을 수도 있다. 하늘에서 용이 내려온다거나, 외계인이 침공하는 이야기가 아니다. 우리 주변에서 언제나 목격할 수 있는 사고를 조합한 것 뿐이다. 즉, 진짜로 일어날 수도 있다는 말이다. 이처럼 우리의 삶은 우연에 지배 받는다.

 

어떤 이는 그 우연을 운명으로 포장하기도 한다. 하긴 어쩌다 벌어진 일이라고 생각하는 것보다는, 그럴 수밖에 없는 운명이라고 생각하는 게 훨씬 속이 편하다. 그게 꼭 나쁘다고 여기진 않는다. 이 모든 게 하늘의 뜻이라고 생각하며 겸허하게 받아들인다면, 인생을 보다 행복하게 살지도 모른다. 주인공 래리도 종교에서 답을 얻고자 한다. 유대인인 그는 랍비들을 찾아가 자신에게 벌어진 일이 무슨 의미인지 알려달라고 한다. 하지만 누구도 답을 주지 못한다. 이런저런 얘기를 하지만 돌아보면 그럴듯한 헛소리에 불과했다.

 

결국, 래리는 답을 찾지 못한다. 답을 찾기도 전에 모든 문제가 어찌저찌 해결되었기 때문이다. 성적 조작은 아무도 모르게 이루어졌고, 아내와는 이혼하지 않았으며, 동생의 변호사 비용도 마련한다. 그러나 또 다른 문제가 발생한다. 건강 검진 결과를 전하는 의사의 목소리가 심상찮다. 전화로 얘기하기는 곤란하니 직접 찾아오라고 말한다. 다시 날벼락 같은 우연이 벌어질 것처럼 영화는 끝을 맺는다.

 

<시리어스 맨>은 우리 삶에 우연이 가득하다는 진실을 보여준다. 인생은 픽션과 다르다. 앞뒤 재지도 않고 황당한 일이 마구마구 벌어진다. 이를 해결하는 과정 또한 치밀하지 않다. 어쩌다 보니 해결된다. 억울한가? 부당한가? 그래도 어쩌겠는가! 그게 인생이다. 인간은 모든 것에 의미를 부여하고 싶어 한다. 그러기 위해 신이라는 존재를 부르기도 한다. 하지만 일개 인간이 신의 뜻을 어찌 알겠는가? 모든 순간의 의미를 어찌 알겠는가?

 

영화의 마지막 장면에는 거대한 토네이도가 등장한다. 이를 바라보는 사람들의 뒷모습이 우리의 인생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거대한 재난 옆에서, 언제 휩쓸려갈지도 모르지만, 어떻게든 삶을 살아간다. 수많은 우연에 삶이 휘청거려도 어쨌든 우리는 계속 살아가야 한다. 삶은 이해할 수 없다. 부조리다. 그게 진실이다. 하지만 모른다고 주저앉을 수는 없다. 어떻게든 살아가야 한다. 코엔 형제는 이런 말을 하고 싶었던 게 아닐까?

 

 

<삼국지>에서 제갈량이 숙적 사마의를 죽음 직전까지 몰아간 적이 있다. 계곡에 몰아넣고 불을 질러 꼼짝없이 타 죽을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그런데 갑자기 하늘에서 비가 쏟아졌다. 지역과 계절을 생각하면 비가 올리가 만무한 일이었다. 하지만 비가 쏟아졌고, 사마의는 무사히 빠져나간다. 이를 두고 탄식하며 제갈량이 말했다.

 

“모사재인, 성사재천.”

 

일을 꾸미는 것은 사람이나, 일을 이루는 것은 하늘이라는 뜻이다. 만약 <삼국지>가 100% 픽션이었다면 그 순간 사마의는 불에 타 죽고, 제갈량은 북벌에 성공했을 것이다. 도리상 그래야 마땅하고, 전개상 그래야 자연스러웠다. 하지만 이야기는 사마의의 승리로 끝이 난다. 실제 인생은 픽션과 다르기 때문이다.

 

<시리어스 맨>은 그런 인생의 진리를 포착한 작품이다. 황당하고 어이없는 이야기로 보일 수도 있지만, 그렇기에 도리어 뛰어난 작품이 된다. 우리 삶은 래리의 이야기처럼 황당하게 흘러왔고, 흘러갈 것이다. 이를 받아들일 줄 아는 것. 그게 바로 철든다는 것이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