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만에서 절대 주워서는 안되는 것

아무 대가도 치르지 않거나 또는 내가 얻게 되는 것보다 비교적 낮은 기회비용을 치르는 경우, 우리는 횡재, 또는 득템했다는 말을 하기도 한다. 일례로 길거리에 우연히 떨어져 있는 돈을 주웠을 때(하지만 고액일 때는 주인을 찾아주는 것이 옳겠다), 또는 로또에 당첨됐을 때를 들 수 있겠다. 물론 거저 얻은 것이라고 해서 모두가 득템하거나 횡재한 상황은 아닌 때도 있다.

 

여행객들 사이에선 이런 괴담이 있다. 야구 커뮤니티 MLBPARK에 올라온 게시물에서 본 것인데, 그 내용에 따르면 타이완(대만)에 가면 길거리에 떨어져 있는 ‘빨간 봉투’를 줍지 말라는 것이다. 19년 전 9·11테러 이후 미국 전역을 테러 공포에 휩싸이게 만들었던, 인체에 치명적인 바이러스가 묻어있는 것이 아니다.

 

타이완 일부에서는 하나의 풍습이 전해 내려오고 있는데, 바로 미혼인 자녀가 죽으면, 그 가족이 죽은 자녀의 머리카락이나 손톱을 돈과 함께 빨간 봉투 속에 넣는 것이다. 이를 길거리에 놓아 두고 멀리서 그것을 주워가는 사람이 있는지 지켜본다. 동성(同性)이 주워가면 다시 빨간 봉투를 놓아두고, 이성(異性)이 주워가면 바로 그 이성과 영혼 결혼식이 성립된다는 것이다. 가족의 입장에선 결혼도 못하고 죽은 자녀의 한(?) 또는 외로움을 달래주는 것이라고 하지만, 봉투를 주운 이의 입장에선 이 속사정을 모두 알아챘을 경우, 괜한 찝찝함을 안고 살아갈 수 밖에 없다.

 

 

그렇다면 우리는 왜 찝찝해하는 것일까. 그 가족이 불쑥 등장해서 자녀가 결혼도 못하고 죽었다고 자초지종을 말하며 결혼해달라고 조르는 것도 아닐 것이다. 그저 ‘낯선 죽은 이와 내가 (쓸데없이) 연결됐다’는 두려움 때문일 것이다. 생전 만난 적도, 내가 숨지기 전까진 만날 일도 없을 (죽은) 사람에 대한 공포다. 반면, 죽은 이의 가족들은 어떻게든 홀로 죽은 자녀의 억울함(?)을 달래주거나, 어떻게는 산 자들의 세상과 지속적으로 연결시키려고 애쓴다. 다시 말해, 봉투를 길거리에 놓아준 사람이나 주워가는 사람의 생각 속에서 ‘죽은 이’는 ‘살아있는 것’과 다름이 없는 셈이다. 안타까운 건, 가족과 제3자 사이에 고스란히 끼어버린 죽은 자는 말이 없다. 봉투를 주운 이성이 마음에 들지 않을 땐 어쩌란 말인가!

 

나는 이 괴담에서 우리 삶에 어떤 메시지를 얻을 수 있을 것인가 곰곰이 생각해봤다. 크게 두 가지인데, 첫번째는 살아있는 사람들과의 ‘소통’이다. 평소 상대방을 위한다는 이유로 실행하는 행동들이 어쩌면 자기 만족을 위한 행동이 될 수도 있다는 것이다. 나의 베풂을 누군가는 호의로, 누군가는 부담으로 받아들일 수도 있다. 타인에 대한 호감을 표현하거나, 오해를 풀기 위해서는 과거의 누적된 경험에 따른 판단에 앞서, 자신에 대한 상대의 이해를 구하거나, 상대를 이해하려는 대화가 필요하다.

 

두번째는 ‘죽음’의 의미다. 최근 독서 중인 <디지털 시대의 사후 세계>의 내용과도 관련이 있는 것이다. 인류는 유사 이래, 죽음 이후 인간은 어떻게 되는 지에 대한 관심을 지속적으로 가져왔다. 그 관심은 무속신앙이나 풍습, 종교 등으로 나타났다. 대만의 ‘빨간 봉투’는 일종의 오랜 풍습인데 여기서 봉투는 산 자와 죽은 이를 연결하는 일종의 매개체다. 생각해보면 오늘날의 사람들은 빨간 봉투가 아니더라도 죽은 이와 쉽게 연결될 수 있다. 바로 죽은 이의 생전 흔적이 고스란히 ‘웹’이라는 디지털 세계에 살아있는 이들과 흔적과 함께 존재하기 때문이다. 누군가가 오프라인 세계에서 당사자의 죽음을 알려주기 전까지 말이다. 어쩌면 우리는 온라인 세상에서 ‘빨간 봉투’를 인식하기도 전에 이미 그것을 주웠을 지도 모를 일이다.

 

참고
1) <대만에서 절대 주워서는 안되는 것>, MLBPARK
2) >대만 길거리에서 절대 주우면 안되는 ‘빨간봉투’에 얽힌 사연>, 차이 나는 중국 네이버 포스트 등
3) <디지털 시대의 사후 세계>, 일레인 카스켓 저, 비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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