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아내의 꿈은 화가다. 나는 그림을 정말 못 그리는데, 내 아내는 슥슥 그리면 사람도 나오고 동물도 나와서 정말 신기하다. 그녀가 미술에 소질이 있다고 생각했고, 본인도 그림 그리기를 무엇보다 좋아하기에, 나는 그녀에게 이렇게 말했다. “네가 화가가 될 수 있도록 내가 도와줄게. 물감도 사주고, 캔버스도 사주고, 도와줄 수 있는 건 다 도와줄게. 내 인생의 일부를 갈아 넣어서 네 꿈을 이뤄줄게.” 이 말은 결국 청혼 멘트가 되었다.
하지만 막상 화가가 되겠다고 하면 참 막막하게 느껴진다. 직업이 화가라는 말은 그림으로 돈을 번다는 이야기다. 내가 그린 그림을 어디에 팔아야 할까? 초심자로서는 쉬운 일이 아니다. 게다가 실력도 키워야 한다. 그녀가 실력이 없는 건 아니지만, (유화로 각종 대회에서 상도 받고 그런다) 아직 프로가 되기에는 모자란다고 본인도 느끼고 있다. 그래서 실력을 키우는 것을 목표로 삼기로 했다. 하지만 여기서 또 의문이 생겼다. 도대체 실력이 뭘까? 그림으로 돈을 버는 실력이란 과연 무엇일까? 이때 오래전에 본 뉴스 한 편이 떠올랐다.
세계에서 유화를 가장 많이 그리는 나라는 어디일까? 서양 미술이니 유럽이나 북미를 생각하겠지만, 세계 최대 유화 제작 국가는 다름 아닌 중국이다. 심지어 중국 전체가 아니라 남부지방의 한 마을에서 전 세계 유화의 60% 이상이 생산된다고 한다. 그 마을의 이름은 다펀, 유화촌이라 불리는 마을이다. 이곳에서는 세계 유명 그림의 모작을 만든다. 고급 레스토랑이나 호텔에 걸린 모작은 거의 이 곳에서 생산된 것이라고 봐도 무방하다. 유화촌에서는 하루에도 수백 점의 그림이 쏟아진다. 어떤 곳은 채색 작업을 색깔별로 분담해 수십 명이 달라붙어 그림을 그린다. 유화 공장이라는 말이 나올 정도다. 실력 있는 화공은 하루 만에 16만 원짜리 고흐의 모작을 그려낸다고도 한다.
누군가는 이들을 화가로 인정하지 않을 수 있다. 사실 화공이라는 말이 더 적합한 게 사실이다. 하지만 이들은 엄연한 프로다. 모작이지만, 그림을 그리고 돈을 받는다. (불법도 아니다) 그럼 프로인 이들에게 가장 필요한 재능이 뭘까? ‘빨리’ 그리고 ‘많이’다. 모작은 예술이 아니라 상품이기에 가격의 한계가 분명하다. 예술이라면 가격이 천정부지로 올라갈 수도 있지만, 상품이기에 수요와 공급에 따라 적정한 가격이 매겨진다. 그럼 정해진 가격에서 더 많은 이익을 얻으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빨리 그리거나 많이 그리면 된다. 다펀촌에서는 ‘빨리/많이’ 그리는 사람이 실력자인 셈이다.
그런데 이렇게 빨리/많이 그리기만 하면 화가로서 창의성을 잃어버리는 게 아닐까? 나는 그렇지 않다고 생각한다. ‘빨리/많이’야말로 예술가로 나아가기 위한 기초 중의 기초라고 생각한다. 내가 이렇게 생각하게 만든 인물이 있다. 우리에게 <키스>라는 그림으로 유명한 구스타프 클림트다.
클림트의 그림은 화려하고 몽환적이다. 예술가적 기질이 강하게 느껴진다. 실제 삶도 우리가 흔히 상상하는 자유분방한 예술가의 그것과 비슷했다고 한다. 그래서 클림트를 타고난 천재로 생각하는 사람도 많다. 하지만 그도 초기에는 화가가 아니라 화공이었다. 그것도 아주 잘나가는 화공이었다. 클림트가 젊었을 때 그가 살던 오스트리아에서는 왕의 명령에 의해 일종의 재개발 붐이 일었다. 클림트는 동료와 공방을 세우고, 새로 짓는 건축물에 들어갈 그림을 그리는 일을 시작했다. 수요는 많았고, 실력도 좋아서, 엄청난 성공을 거둔다. 이때 그린 그림을 보면 그의 대표작과는 다른 기술자적 면모가 두드러진다.
클림트는 훗날 비잔틴 모자이크로부터 영감을 받아 자신만의 독창적인 미술 세계를 확립한다. 그가 화공에서 화가로 거듭난 순간이다. 그럼 이전까지 화공으로서의 삶은 아무런 의미가 없는 걸까? 나는 반대라고 생각한다. 화공 시절이 있었기에 세기를 뛰어넘는 위대한 화가가 될 수 있었다고 본다. 일단 화공 시절 많은 돈을 벌었기에 예술을 추구하면서도 경제적인 독립을 유지할 수 있었다. 다음으로 그때 길렀던 기본기가 훗날 혁신적인 양식을 창조하는 데 도움을 주었다. (클림트의 그림은 추상적이면서도 인물의 얼굴 등 매우 사실적인 묘사가 드러나는 부분이 있다)
그래서 우리는 결론을 내렸다. 실력을 키우기 위해 해야 할 일은 빨리/많이 그리는 것이라고. 실력은 기본에서 나오고, 빨리/많이는 기본 중의 기본이라고. 훌륭한 프로는 마감을 준수한다는 걸 고려하면 타당한 결론이라고 생각한다.
아내의 그림만 해당하는 게 아니다. 무슨 일을 하든 마찬가지다. 빨리/많이 할 줄 아는 것은 프로의 기본이다. 상품도 제대로 기한 안에 만들지 못하면서 예술을 하겠다고 말하는 것은 오만에 불과하다. 당신이 일 잘하는 사람이 되겠다면 빨리/많이 해낼 줄 알아야 한다. 일을 넘어 예술의 경지로 올라가더라도 빨리/많이는 기본 중의 기본으로 남을 것이다. 그렇게 빨리/많이 해내다 보면 창작에 꾸준함이라는 날개가 달릴 것이다. 그러면 위대한 예술까지 오를 수 있다고 나는 믿어 의심치 않는다.
참고 : 중국, 세계 최대 유화촌을 가다, KB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