팍팍한 삶을 달달하게 만드는 비법

 

최고의 판타지 감독은 누구일까? <반지의 제왕>을 감독한 피터 잭슨? 잔혹 동화의 귀재 기예르모 델 토로? 하지만 나는 이 사람을 꼽고 싶다. 그가 만든 작품은 어느 것 하나 빼놓지 않고 환상적이다. 찬란한 감동을 느끼는 데 있어 피터 잭슨 못지않다. 동시에 독창적이라 어느 것을 보더라도 그의 작품임을 단번에 알아차릴 수 있다. 그가 표현하는 기괴함은 기예르모 델 토로보다 아름답다. 여기에 가슴을 뭉클하게 하는 감동까지 더한다. 그의 이름은 바로 팀 버튼이다.

 

그런데 내가 가장 좋아하는 팀 버튼의 영화는 판타지가 아니다. 물론 그의 작품답게 환상적인 이야기가 등장하긴 하지만, 명백하게 ‘거짓말’이라고 선을 긋는다. <가위손>처럼 비현실적인 인물이 등장하지도 않고,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처럼 판타지 공간이 펼쳐지지도 않는다. 하지만 오히려 현실적이기에 더 환상적으로 다가온다. 그 끝에서 무한한 감동과 삶에 대한 강렬한 통찰을 제공한다. 그 작품의 이름은 바로 <빅 피쉬>다.

 

<빅 피쉬>의 중심에는 아버지와 아들이 있다. 문제는 아들이 아버지를 몹시 싫어한다는 것. 왜냐면 아버지가 뻥쟁이이기 때문이다. 평생 모험을 즐겼던 아버지 ‘에드워드 블룸’은 자신의 경험을 과대포장하여 떠벌리기 좋아했다. 하지만 아무리 신기한 이야기라도 매번 듣다 보면 싫증이 나기 마련. 아들 ‘윌’은 아버지의 이야기가 지겨워지기 시작했고, 그 이야기가 모두 거짓임을 알고는 실망하여 아버지를 멀리하기 시작한다.

 

그러던 어느 날 윌은 아버지가 위독하다는 소식을 듣게 되고, 오랜만에 집을 찾아와 아버지와 조우한다. 그리고 아버지를 대신해 수영장과 창고를 정리하다가 아버지의 거짓말이 진실임을 보여주는 문서를 발견하게 된다. 아버지의 진짜 모습이 궁금했던 윌은 사실을 확인하기 위해 길을 나서고, 그 끝에서 거짓과 사실을 뛰어넘는 진실을 발견한다.

 

 

<빅 피쉬>에는 흥미로운 거짓말이 가득하다. 엄청난 거인이 나오고, 늑대인간이 등장하며, 샴쌍둥이와 은행강도 시인이 출현한다. 하지만 아들은 사실을 추구한다. 거짓이 아닌 진짜 이야기를 듣고 싶어한다. 그런데 사실은 그만큼의 가치가 있었을까?

 

아들이 가장 싫어하는 거짓말은 자신이 태어난 날에 관한 이야기다. 아버지는 아들이 태어난 날 금반지로 거대한 물고기를 낚았다는 이야기를 꾸며댄다. 아들은 하도 많이 들어서 귀에 딱지가 앉을 정도다. 그러던 중 아버지의 주치의로부터 ‘사실’을 듣게 된다. 아버지는 출장을 떠났고 어머니는 이웃의 도움으로 병원에 도착해 아들을 낳았다고 한다. 아무런 문제 없는 완벽한 출산이었다. 그게 다였다. 사실이라는 것은 너무나 무미건조했다.

 

이렇게 거짓과 사실을 모두 듣게 된 순간, 아들은 ‘진실’이 무엇인지 깨닫게 된다. 아버지가 꾸며낸 모든 이야기들. 그것은 아들을 기쁘게 해주기 위한 아버지의 사랑이었다. 무미건조한 사실을 전하는 것보다 촉촉하고 달콤한 거짓말을 전하는 게 더 로맨틱하다. 만약 사실과 거짓 중에 하나를 골라야 한다면, 나라도 기꺼이 달달한 거짓을 고를 것 같다.

 

여기서 중요한 가치를 얻을 수 있다. ‘사실’과 ‘진실’은 다르다는 것이다. 흔히 사실과 진실은 동의어로 사용된다. 영화에서도 진짜 이야기를 진실(True)이라고 표현한다. 사실(Fact)이라고 굳이 구분 짓지 않는다. 그러나 사실은 표면적일 뿐이다. 출산은 평탄했고, 아버지의 말은 거짓이었다. 그렇게 사실만을 바라보면 거짓에 담긴 진심을 읽을 수 없다. 그 진심까지 포함하는 게 바로 진실이다. 눈에 보이는 현상만을 보는 게 아니라, 그 안에 숨겨진 맥락까지 파악해야 진실을 볼 수 있다.

 

사실과 진실에 관한 이야기는 저널리즘의 단골 소재다. 언론은 사실만 보도할 것이 아니라 진실을 파헤쳐야 한다는 것이다. 사실과 진실이 다른 대표적인 사례로 ‘포르말린 골뱅이 사건’이 있다. 어느 식품 회사의 골뱅이 통조림에서 포르말린이 검출되었다. 유해 물질이 발견되자 검찰은 제조 업자를 구속했다. 그러나 검찰은 천연 포르말린의 존재를 간과했다. WTO에 따르면 포르말린은 모든 생명체에서 발견될 수 있다고 한다. 즉, 포르말린이 발견된 것은 사실이나, 그것이 식품 회사의 범죄 행위로 판단할 수는 없는 셈이다. 하지만 당시 검찰은 사실과 진실을 구별하지 못했고, 애꿎은 식품 회사만 누명을 쓰고 회사가 망하는 사태에 이르게 된다.

 

<빅 피쉬>는 이렇게 딱딱할 수 있는 사실과 진실에 관한 이야기를 촉촉하고 훈훈한 가족 서사에 녹여냈다. 뻥쟁이 아버지의 진실은 지극 정성의 아들 바보였던 셈이다. 아버지의 거짓말 덕분에 아들의 삶은 누구보다 환상적일 수 있었다. 이것이 우리가 이야기를 만들고, 판타지를 추구하는 이유가 아닐까 한다.

 

아버지의 거짓말은 어떤 의미를 가질까? 단순히 피식잼에 그치고 마는 걸까? 에드워드 블룸의 인생은 지극히 평범했을 것이다. 실력있는 외판원으로 어느 정도 재산을 모았지만, 그 이상의 무언가를 찾기는 힘들 것이다. 그러나 그의 장례식장에는 많은 인파가 몰려들었다. 그들의 표정은 하나 같이 행복해 보인다. 고인을 추억하는 것만으로도 미소가 가시지 않는다. 그저 평범한 삶이었다면 주변에 이토록 많은 행복을 뿌릴 수 있었을까?

 

나는 진실을 파악하는 데에서 한발 더 나아가고 싶다. 단순히 사실과 진실을 구별하는 데 그칠 게 아니다. 우리 삶을 기꺼이 아름다운 거짓으로 채워야 한다고 말하고 싶다. 왜냐하면 우리 삶은 지극히 평범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당신의 삶에 기적 같은 성공은 찾아오지 않는다. 백마 탄 왕자님도 등장하지 않는다. 어제는 오늘이 되고, 오늘은 내일이 되는 쳇바퀴 같은 삶이 이어질 뿐이다. 그 속에서 진실을 찾아봤자, 발견하는 것은 재미없고 쓸쓸한 이야기뿐이다. 하지만 적극적으로 아름다운 거짓을 채워보면 어떨까? 평범했던 일상에 약간의 과장과 오글거림 한 스푼, 뻔뻔함 한 줌을 더하면 우리의 삶도 그럴듯한 이야기가 된다. 그렇게 이야기가 되었을 때 삶은 의미를 갖는다.

 

 

한창 미국과 소련이 우주 탐사 경쟁을 벌이던 시절. 당시 케네디 대통령이 NASA를 방문했다가 우연히 청소부를 만났다.

 

“청소하느라 힘드시죠?”

 

대통령은 흔한 안부 수준의 질문을 던졌다. 그런데 돌아온 청소부의 대답이 감동이었다.

 

“사람이 달에 착륙하는 일을 돕고 있다고 생각하니 하나도 힘들지 않습니다.”

 

여기서 사실은 그가 단순한 청소부라는 점이다. 솔직히 그가 달 착륙에 기여한 점은 거의 없다고 봐도 무방하다. 그러나 청소부는 사실에 약간의 허풍을 더한다. ‘내가 달에 착륙하는 데에 세운 공이 장난 아닐걸?’ 이 작은 거짓말에 그는 청소부 그 이상의 존재가 된다. 평범한 삶이 이야기가 되고, 이야기는 다시 삶에 의미를 부여한다. 당신의 평범한 삶을 이야기로 만들어라. 더는 평범하지 않게 될 것이다.

 

긍정심리학의 창시자 마틴 샐리그만은 사건(Accidents)과 결과(Consequences) 사이에는 믿음(Belief)이 작동한다고 말한다. (이를 ABC 연결고리라고 한다) 사건 그 자체는 아무런 결과도 가져오지 않는다. 그것이 특정한 감정과 행동으로 이어지려면 우리의 신념체계에 의해 해석되고 매개되어야 한다. 컵에 물이 50% 차 있을 때, 누구는 반밖에 안 남았다고 말하고, 누구는 반이나 남았다고 말한다. 물론 이런 신념체계가 어느 날 뚝딱하고 만들어지진 않는다. 꾸준하게 긍정적인 태도를 훈련했을 때야 얻을 수 있다. 마음에도 근육이 있는 셈이다.

 

그래서 이런 말이 있다. ‘태도가 전부다. 습관이 삶이다.’ 우리가 어떤 삶을 사는가는 우리가 세상을 바라보는 태도와 그것을 이루기 위한 습관에 좌우된다. 이때 귀여운 허풍을 더하는 것이 도움이 될 수도 있다. 우리 삶이 퍽퍽해지지 않도록 조금은 침을 바를 필요도 있다. 그렇게 세상을 흥미로운 이야기로 바라보기 시작하면, 당신의 삶도 분명히 흥미로워질 것이다.